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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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반도와 커지는 확전 위험

2022-08-23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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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부터 1856년까지 벌어진 크림 반도 전쟁은 ‘첫번째 현대전’이라 불린다. 병력 이동에 열차가 처음 체계적으로 사용됐으며 전보를 통해 전황이 실시간으로 전달됐고 전투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증기로 가는 전함도 이 때 첫 등장했고 ‘백의의 천사’로 유명한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것도 이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를 상대로 벌인 이 전쟁의 형식적 명분은 팔레스타인의 기독교 보호였지만 실상은 유럽 무대에 신흥 강자로 떠오르려는 러시아 견제가 주목적이었다. 89만 명의 러시아 군이 67만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결과는 45만의 사상자를 낸 러시아의 참패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는 흑해의 제해권을 뺏기고 유럽의 2등 국가로 추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이곳을 차지한 소련은 1954년 이를 연방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에게 넘겨주지만 2014년 푸틴은 이를 불법 점령한 후 합병해 버렸다. 러시아 치욕의 역사가 담긴 이곳을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찾아오자 서방의 지탄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 푸틴은 더 이상 영토에 야심이 없다고 말했으나 올 들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침략했을 때 크림 반도는 침략군의 주 병참 기지 역할을 했다. 크림 합병 없이 우크라이나 남부 침공은 어려웠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크림 반도는 ‘겨울의 나라’ 러시아에서는 드물게 연중 따뜻한 휴양지로 러시아의 고위 관리와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이곳에서 잇달아 폭발 사건이 일어나면서 6개월째를 맞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새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주 이곳 러시아 무기고에서 대폭발이 일어나 러시아 군용기 9대가 파손됐으며 그 전에는 러시아 흑해 함대가 있는 세바스토폴에 드론 공격으로 해군 행사가 취소됐다. 러시아 흑해 함대는 이미 기함 ‘모스크바’를 미사일 공격으로 잃은 바 있다.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러시아 흑해 함대 사령관은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이들 공격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특수 부대의 소행이라는 게 정설이다.

또 지난 주말에는 모스크바 인근에서 ‘푸틴의 정신적 사부’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딸 달리야 두기나가 몰던 차가 차량 폭발로 사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극 지지하던 두긴의 딸 폭탄 테러 사망 사건에 대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이와는별도로 러시아 남부 자포리자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도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이곳에 있는 유럽 최대 규모의 원자력 발전소 때문이다. 러시아 군은 이곳을 점령한 후 강 건너에 있는 니코폴을 공격하는 거점으로 삼고 있는데 전투 와중에 냉각 장치나 이에 전기를 공급하는 변압기에 이상이 생길 경우 원자로 폭발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렇게 될 경우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러시아와 유럽까지 피해가 미칠 수 있다. 이미 여기 전기를 공급하는 고압 전선 4개 중 2개는 포격으로 끊긴 상태다.

월남전의 승패를 가른 대표적 사건으로 1968년 1월의 ‘텟 공세’가 꼽힌다. 베트남의 음력설에 맞춰 월남 전역의 군사 및 민간 시설에 대한 월맹의 대대적인 공세는 결국 진압됐으나 이를 TV로 지켜본 미국 여론은 ‘모든 게 잘 되고 있다’는 정부 발표에 등을 돌리게 됐고 결국 미군 철수와 월남 패망으로 이어졌다.

크림 반도와 모스크바에서 연이어 폭탄이 터지고 총성이 울리면서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다’는 러시아 정부 발표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최근 잇단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 공격은 군사적 성과도 성과지만 러시아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을 흔들려는데 목적이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 6개월 간의 전쟁으로 러시아는 1만5,000 사망에 4만5,000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되며 병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러시아 국민들은 대체로 이 전쟁에 대한 지지를 보내왔으나 이들이 돌아서면 푸틴도 전쟁 중단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토 확장 등 가시적 성과 없이 전쟁을 끝낸다면 그 후폭풍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러시아 당국자 입에서 핵 전쟁 운운하는 협박이 계속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는 젤렌스키대로 크림 반도 공격과 요인 암살을 통해 러시아 국민들의 불안감을 불러 일으켜야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고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6개월을 넘기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이 위험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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