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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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 힘 있어야 나를 지킨다

2022-08-19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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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이 대만을 방문한데 이어 8월 중순에는 미 여야 의원단 5명이 대만 방문을 했다. 이에 중국은 26년만에 대만 주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고 중국 전투기와 드론이 양국 경계선을 연일 드나들고 있다. 이 상황에 2,300만 명의 대만 국민들은 얼마나 불안해 할 것인가.

미국은 1949년 중국이 아닌 대만을 공식 정부로 인정했다. 그런데 1971년 대만은 유엔에서 회원국 지위를 중국에 빼앗겼다. 이어 미국은 지미 카터 행정부 시절이던 1979년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 1월1일자로 조약의 폐지를 통보했고 1년 뒤인 1980년 1월1일자로 종료되었다.

당시 명동에 나가면 중국대사관 뜰이 보이는 커피 전문점 ‘가무’에 자주 가곤 했다. 뜨거운 커피 위에 달콤한 휘핑크림을 가득 얹어주는 비엔나커피는 얼마나 맛이 있는 지, 이 곳 2층 테이블 창문으로 울창한 녹음과 맑고 시원한 공기가 들어왔고 복잡한 명동 거리 한복판에 평화로운 공간이 있었다. 비엔나커피를 마신 후에는 기사에 참조할 대사관 뒷골목 가판에서 파는 일본 잡지 신간을 사러 가곤 했었다.


이후 미국에 오고 90년대 중반에 서울에 나가보니 붉은 중국 대사관 주인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바뀌어있었다.

원래 한국과 대만은 형제의 나라처럼 친했다. 중국 국민당이 대륙의 합법적 정권이었던 시절,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한국 정부는 1992년 8월24일 중국과 수교함과 동시에 대만과의 단교를 통보하며 21일에 3일(72시간)이내에 대사관의 국기와 현판을 철거하고 퇴거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미국에는 1979년 4월10일에 공표된 대만 관계법이 있다. 안보로나 경제성으로나 무시할 수 없는 대만이 충분한 자기 방어 능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국방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한 조항이다. 2020년에는 미국은 타이완 동맹보호법과 대만 보증법을 제정했다.

이번 미국 고위층의 대만 방문으로 중국 측은 통일은 역사의 대세라면서 대만 독립은 역사의 흐름에 역행한다며 불만을 표했다. 대만 해협이 긴장되어 미중간에 충돌이 일어나면 당연히 한국에도 큰 불똥이 튄다. 2만 명의 주한미군에도 변수가 생긴다.

미국이 서태평양 제해권과 동아시아 우방국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을 가만 두고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당장은 우리 국민이 당할 위협과 공포가 문제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든든한 한미동맹관계라 믿고 있지만 먼저, 우리 스스로 무시당하지 않을 힘을 길러야 한다.

100년 전 한국의 근대는 나라를 빼앗긴 암흑의 시대였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1864년, 일본의 메이지는 1867년에 즉위했는데 이때만 해도 두 나라의 힘은 비슷했다. 그러나 수십년 후 일본은 득세하고 조선을 쪼그라들다가 결국 1910년 일본에 먹히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일본은 개화를 받아들여 봉건 체제를 신분에 상관없는 평등을 지향, 근대화에 성공해 힘을 비축했다. 1899년에는 메이지 헌법 발표로 명실상부한 국가 원수가 되면서 쇼와시대(1926~1989)에 각종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빌미가 됐다.

고종은 꺼져가는 조선의 등불을 다시 켜고자 세계만방에 특사를 보내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열강들은 암암리에 밀약을 맺고 약소국을 나눠서 차지하는 것이 그들의 평화라 여기는 시기였다. 여기에 조선의 지배층은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여 양반과 하층민의 계급을 심화시키다가 급기야 일제의 야욕 앞에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섰다.

20세기 약육강식 시대의 조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또 미국과 대만의 역사적 관계는 우리에게 하나의 교훈이다. 자주국방을 토대로 한미동맹을 굳건히 해야 함은 물론 세계관이 맞는 강한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 국가간 분쟁은 국력이 해결한다. 힘이 있어야 우리를, 나를 지킬 수 있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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