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주 휴스턴은 의외로 예술적인 도시다. 깜짝 놀랄 만큼 좋은 미술관들이 가까이 모여 있고, 드물게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100년 역사의 휴스턴 미술관(MFAH)과 메닐 컬렉션(The Menil Collection) 덕분인데, 이 두 곳만 찬찬히 돌아보아도 가슴 벅차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휴스턴 뮤지엄은 전시장 면적으로는 미국에서 메트로폴리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곳으로, 7만 여점에 달하는 컬렉션이 아주 훌륭해서 제대로 보려면 하루가 모자랄 정도다. 세계 최다의 에셔(M.C. Escher) 컬렉션을 갖고 있고, 한국미술 갤러리는 국립중앙박물관 및 아모레퍼시픽 뮤지엄과 장기대여 협약을 맺고 있어서 수준 높은 5,000년 역사의 유물들을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곳은 메닐 컬렉션 캠퍼스다. 석유재벌의 딸이며 예술후원가였던 도미니크 드 메닐이 1987년 설립한 이 미술관은 30에이커의 부지에 4개의 전시관을 운영한다. 메닐 부부가 소장했던 1만7,000여 점의 회화, 조각, 판화, 사진, 희귀서적을 전시하는 본관과 함께 사이 톰블리 갤러리, 댄 플래빈 전시홀, 메닐 드로잉 인스티튜트 등 여러 위성 갤러리들이 아름다운 메닐 공원 주변에 널찍널찍 자리 잡고 있다. 각 건물은 렌조 피아노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해 그 자체로도 예술적 품격이 높다.
그리고 또 하나 ‘로스코 채플’(Rothko Chaple)이 있다. 메닐 부부는 뮤지엄을 짓기 훨씬 전인 1964년 화가 마크 로스코에게 그의 작품들로만 장식된 채플을 짓고 싶다고 의뢰했다. 그러잖아도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는 공간에 대해 까다로웠던 로스코는 적극적으로 건축에 참여했고, 그 디자인에 맞는 14개의 대작을 1967년 완성했다. 그러나 우울증으로 고통 받던 그는 건물이 완공되기 한해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그의 작품들이 설치된 채플은 주인공 없이 1971년 개관했다. 이후 로스코 채플은 종교와 관계없이 한해 수만명의 사람들이 찾아와 명상하고 기도하는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2016년 휴스턴을 방문했을 때, 뜻하지 않은 전율이 일며 울컥한 적이 두 번 있었다. 한번은 로스코 채플에서, 또 한번은 사이 톰블리 갤러리에서였다.
팔각형으로 둥글게 지어진 로스코 채플에 들어갔을 때, 실내는 어두웠고 8개의 벽에는 어두운 그림들이 붙박이처럼 걸려있었다. 텅 빈 가운데 공간에는 긴 의자 몇 개, 그리고 방석들이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아주 조용했고, 사람들은 앉거나 눕거나 편한 대로 자리를 잡고 상념에 빠져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 초월적 공간이었다. 로스코의 유작이라고 해도 좋을 14개의 검푸른 캔버스가 강렬한 침묵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삶과 죽음의 대화를 들려주었다.
깊은 고요와 어둠 속에서 가슴이 찌릿하고 소름이 돋았다. 동행이 없었다면 마냥 그대로 있었을 것이다. 당시엔 실내가 무척 어두웠는데 지금은 스카이라잇 자연광을 들이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채플 내부가 훨씬 밝아졌다고 한다. 다시 가보면 그 감격이 여전할지 궁금하다.
로스코 채플보다 더 마음을 울렸던 건 추상표현주의 화가 ‘사이 톰블리 갤러리’(Cy Twombly Gallery)였다. 톰블리(1928-2011)의 작품은 거의 모든 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보았으나 한 곳에 30여점이 전시된 갤러리는 처음이었다. 이곳 역시 작가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건축돼 1995년 개관했다.
백지처럼 흰 공간에 들어섰을 때 갑자기 가슴이 뭉클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어린아이 낙서 같은 작품들이 주는 시적이고 원초적이며 내밀한 감동이 주체할 수 없이 밀려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설명 불가능한 영혼의 체험이었다. 전시장에는 한명의 관람객도 없었다. 함께 갔던 이가 전시장을 다 둘러본 듯했을 때 “잠시 먼저 나가서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얼마동안 혼자서 그 이미지들이 주는 개인적이고 즉흥적인 무의식의 언어에 흠뻑 젖어들었다.
8월2일부터 게티 센터에서 사이 톰블리 특별전(Cy Twombly: Making Past Present)이 열리고 있다. 고대미술부터 중세와 근대미술까지만 커버하는 게티 센터가 이례적으로 개최하는 현대미술전이다. 톰블리는 1959년 로마로 이주해 살면서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에 천착한 은유적 작품을 많이 남겼는데, 현대미술과 고대 고전문화의 연결성을 보여준 작가라는 점에서 게티가 대형 기획전을 마련한 듯하다. 오는 10월30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에는 ‘신화의 신화’를 재창조한 톰블리의 회화, 조각, 드로잉, 콜라주, 사진과 함께 작가 자신이 수집하고 소장했던 고대 대리석과 브론즈 조각유물들이 처음으로 함께 선보인다.
많은 사람에게 사이 톰블리의 작품은 영낙없는 낙서다. 어린아이가 장난한 것처럼 아무렇게나 휘갈긴 선, 기호, 글자, 색채가 흰색 캔버스에 드문드문 뭉개져있다. 해독이 불가한 그만의 세계에서 예술의 원형을 찾아보는 건 관람자의 몫이다. 플라토, 아폴로, 아프로디테, 디오니소스, 오르페우스, 레다와 백조, 사포의 시, 아킬레스의 복수 같은 신화를 좀 알고 있다면 수수께끼 같은 작품들과의 조우에 얼마간 도움이 되리라. 그래도 메닐 캠퍼스의 ‘사이 톰블리 갤러리’에서 뇌우처럼 마주쳤던 그 감동에는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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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