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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의 마지막 가족 찾기

2022-08-16 (화)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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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본 케빈은 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머리를 민 것 같았다. “또 달라이 라마 만나러 가요?” 불쑥 이런 인사가 나왔다. 그는 전에 인도 여행을 할 때 달라이 라마를 친견한 적이 있다. 오지 여행을 좋아하니 이번에 또 인도 어디쯤을 다녀오려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 섣부른 인사에 그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설마-.

그는 암 투병 중이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지고 바다 속을 누비는 수중 사진작가인 그는 건장한 60대 초. 평소 건강으로 봐서 암과 가장 멀리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자각 증세는 전혀 없었다. 지난해 말 우연히 목에 작은 몽우리가 잡혀 병원을 찾았다가 림프 암 판정을 받았다. 4기라고 했다. 배속에 이미 직경 5.5인치에 이른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이 크기인데도 촉진을 한 의사의 손에도 만져지지 않았다. 암 진단을 받은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에게도 뜻밖의 일이었다.


이런 일을 겪으면 보통 5단계의 심리상태를 경험하게 된다고 말해진다. 부인, 분노, 타협, 우울, 그 다음에 수용. 그는 이 다섯 단계를 5초만에 거쳤다고 한다. 화학치료를 시작했다. 다섯 가지의 독한 약물이 섞인 치료제가 투입됐다. 처음과 지난 달 끝난 6차 때가 가장 힘들었다. 회가 거듭되자 여러 부작용이 생겼다.

독신인 그는 키모 후 2~3일은 거의 혼자 누워 지냈으나 그냥 집에 있지만은 않았다. 키모 후 2주 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치료제의 독성 물질은 주입 후 최대 반년까지 체내에 남는다고 한다. 10년내 심장마비 확률이 5% 정도 더 높아진다고도 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압력이 커지는 바다 속은 그만큼 사고 위험이 높다. 의사의 권유 대로 바다를 포기하는 대신 산행을 택했다. 산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프다고 주저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산은 자주 갔던 LA근교의 마운틴 볼디를 오른다. 3,000미터가 넘는 이 산은 갈 때마다 만만치가 않다. 걸을 수 있는 데까지 걷자, 헤드 랜턴을 잘 챙겼다. 평소 5~6시간이던 왕복산행이 첫 키모 후에는 12시간 이상 걸렸다. 몸이 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키모 사이 사이 산행을 거르지 않았다. 지금은 주 2~3번도 오른다. 다음 달에는 네팔에 가기로 했다. 한 달 동안 트레킹을 하며 전에 갔던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와 6,500미터 높이의 봉우리도 하나 오를 계획이다.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입양아로 미국에 온 그에게는 남겨진 숙제가 있다. 가족을 찾는 것이다. 60여년 전에 헤어진 부모는 이미 돌아가셨을 수 있다. 하지만 교복입은 쌍갈래 머리 소녀로 또렷이 기억되는 누이는 찾을 수 있을 지 모른다. 아니면 조카라도.

그의 가족 찾기 노력은 40년이 넘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한국서 직장을 잡고 가족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DNA등록도 해 놨다. 처음 맡겨졌던 의정부의 고아원도 찾아가 봤다. 그의 사연은 한국의 TV 프로그램과 여러 일간지와 잡지 등에도 소개됐었다. 다른 나라에 따로 입양된 쌍둥이 자매가 찾아지는 기적 같은 세상이 되긴 했으나 그는 아니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기대밖의 소득이었지만 그것뿐이었다.

3살 정도 아이의 기억이 어느 정도 정확한지 모르겠으나 그는 당시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모가 집을 비운 새 혼자 집에 있다가 또래 친구에게 이끌려 시장 구경에 나섰다가 친구를 놓쳤다. 울고 있는 그를 어느 할아버지가 주스 한 잔을 사 주며 파출소에 데려다 줬다. 그 때 걸었던 아스팔트 길, 파출소의 전화기와 유리창 너머 풍경, 처음 만져 봤던 벽돌 감촉을 아직 기억한다. 파출소에서 도넛 같은 빵 하나를 줬고, 얼마 뒤 지프를 타고 인근 고아원에 갔다고 한다. 미처 다 먹지 못해 손에 들고 있던 빵은 차에서 내리면서 버려야 했다. 동그란 안경을 쓰고 촛불 옆에서 책을 읽던 아버지의 옆 얼굴, 어머니는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많이 업혀 지냈던 듯하다.

이듬해 입양 기관인 홀트를 통해 미국에 온 그는 ‘1959년생, 케빈 리’로 살고 있다. 나이도 성도 추정일 뿐, 김씨 일 수도 박씨 일 수도 있다. 생일도 서류에는12월25일로 적혀 있었으나 나중에 12월5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양부모에게 들었다. 그 덕에 매번 크리스마스에 묻혀 지나갈 뻔했던 생일 선물을 따로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젊어 어려 보이기까지 하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요즘 비로소 제 나이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다. 투병 몇 달이 그만큼 힘들었다는 뜻일 것이다. 계획했던 화학 치료를 얼마 전 끝내자 주먹만 하던 복부 종양은 직경 1센티 정도로 줄었다. 주치의는 완치라는 생각을 갖지 않도록 당부했다. 그 또한 앞으로는 암을 다스리며, 암과 함께 산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내년에는 의정부에 나가서 몇 달 살기로 했다. 노인정도 찾아 가고, 동네 곳곳을 돌며 가족을 수소문해 볼 생각이다. 아직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케빈은 이번이 아마 마지막 가족 찾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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