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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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컨 - 그 쾌적함과 불공평함

2022-08-12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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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20대 대통령인 제임스 가필드는 1881년 3월 취임하고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독립기념일 사흘 전 워싱턴 D.C. 기차역에서 저격당한 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총탄이 너무 깊이 박힌 탓이었다. 당시 백악관 의료진은 해군 엔지니어들을 불러들였다. 무더운 여름, 환자의 몸을 시원하게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들은 얼음물에 담근 시트를 환자 가까이 널어두고 뒤에서 선풍기를 돌리는 시스템을 고안했다. 그럼에도 감염증이 심해져 대통령은 9월 중순 사망했다. 에어컨이 없어서 생긴 일이었다.

에어컨은 그로부터 21년 후인 1902년 7월 17일 발명되었다. ‘에어컨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스 캐리어가 그날 세계최초로 냉방시스템 디자인을 완성했다.

당시 브루클린의 한 인쇄공장은 여름철 무더운 날씨로 애를 먹었다. 칼라 인쇄를 하려면 여러 번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데 고온다습한 날이면 잉크가 마르지 않아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종이가 눅눅해지면서 크기가 늘어나 차질이 생겼다. 작업실 안을 서늘하고 건조하게 만들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때 이 작업을 맡은 사람이 코넬에서 공학석사를 마치고 난방로 제작회사에 갓 취직한 25세의 청년 캐리어였다.


에어컨은 가히 세상을 바꾸어놓았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이 실내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대혁신이 일어났다. 20세기 굴뚝경제의 시대에 제과에서 군수품 제조에 이르기까지 한여름에 차질 없이 공장가동이 가능했던 것은 에어컨 덕분이었다. 무더위를 피해 냉방 잘 된 영화관으로 관객들이 몰리면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생겨나고, 대형 샤핑몰이며 대서양횡단 항공편도 에어컨이 있어 가능했다. 캐리어는 1998년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기후변화가 에어컨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쾌적함을 선사하는 고마운 문명의 이기라는 인식 한편으로 기후위기와 불평등을 부추긴다는 불편한 시선이 더해졌다. 지난달 말부터 미국에서는 6,000만명이 100도 넘는 폭염을 경험했다. 남가주는 연일 100도 가까운 고온이 이어지고 있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어떻게 견뎠을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 그런데 실제로 에어컨 없이 이 더위를 견디는 사람들이 있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평등의 산물이라는 사실에 또 다시 숨이 막힌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더위도 불공평하다. 더운 여름날 모두가 같은 열기를 느끼는 게 아니다. 소득이 상당부분 체감온도를 결정한다.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2008년~2017년 5월에서 9월 사이 기온이 90도 이상인 날이 늘수록 사망자가 늘면서 연 평균 1,373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로 폭염이 잦아지면서 온열관련 보건 불평등이 심화했다고 진단하고, 저소득층 지역에 그늘이나 냉방시설 접근성을 높일 것을 제안했다. 대부분 전기료를 감당 못해 에어컨을 틀지 않거나 에어컨이 없어서 생긴 인명피해이기 때문이다.

폭염으로 저소득층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기후변화 탓만은 아니다. 부유층 지역과는 전혀 다른 주거환경 때문이고, 여기에는 오랜 인종차별의 유산이 담겨있다. 부유층/중산층 거주지역은 대부분 나무들이 우거지고 녹지대가 많아서 그늘지고 시원하다. 반면 저소득층 거주지역은 나무는 거의 없고 건물들만 다닥다닥 붙어있는데다 아스팔트 바닥이 열기를 빨아들여 지표면 온도가 높다. 예를 들어 UC 데이비스 연구진이 인공위성 데이터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LA 인근 실버레이크의 지표면 온도는 96.4도인데 비해 같은 시간 바로 옆 동네인 이스트 할리우드의 온도는 102.7도였다. ‘온도 불평등(Thermal Inequality)’이다. 전자는 가구당 연소득 9만 8,000달러 이상 백인 밀집지역, 후자는 연소득 2만7,000달러 이하의 유색인종 지역이다.

저소득/유색인종과 고소득/백인의 거주지역이 분리된 데는 인종차별 정책이 기여했다. 일정구역을 벗어날 경우 유색인종은 정부지원 모기지 융자 등 재정적 혜택을 받을 수 없게 규정한 레드라이닝이다. 1968년 공정주거법이 제정되면서 금지되었지만 레드라이닝은 알게 모르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기후 관련 불평등의 핵심은 결국 소득이다. 소득이 많을수록 소비는 늘고 그만큼 온실가스 배출량은 늘어난다. 2018년 기준 글로벌 평균 1인당 연간 배출량은 5톤, 소득상위 1%의 배출량은 70톤, 억만장자들의 배출량은 수천 톤이다. 그렇게 온실가스가 늘어나면서 기후위기는 심화하고 그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는 것은, 불공평하게도, 지구온난화와 가장 무관한 이들이다.

더운 날들, 에어컨을 안 틀 수는 없다. 하지만 에어컨을 트는 만큼 온실가스는 배출되고 기후변화가 심해져 날은 더더욱 더워진다. 악순환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초래한 환경에서 산다. 전 세계 온실가스의 80%를 배출하는 주요 20개국(G20)의 책임감 있는 대처가 시급하다. 자연환경 파괴로 병든 지구가 울고 있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이 기상이변으로 생과 사의 벼랑 끝에 내몰리며 울고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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