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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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백일홍 연가

2022-08-07 (일)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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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흔하디 흔한 종이박스도 한때는 이삿날이 다가오면 몇 날 며칠 동네가게를 들락거리며 발이 닳도록 구해 보지만, 여의치 않으면 돈을 주고서라도 빈 박스를 부탁했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전화 한 통이면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이삿짐센터에서 나온 건장한 젊은 이들이 가져온 박스에 차곡차곡 종류 별로 담아 깨끗이 뒤처리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 참 좋아졌다는 생각이 절로 나온다.

돌이켜보면 이제까지 수없이 이사를 다녀 보았지만 그때마다 나이 수만큼이나 불어나는 짐들이 트럭 두어 대를 거뜬히 채웠던 가재도구와 가구들, 무엇보다 많은 짐들을 들여 놓기 위해 그때마다 집 평수도 불어났던 것 같다.


어리기만 하던 자식들이 자라서 학교에 들어가고, 그때부터는 또 공부시키느라 전전긍긍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을 보내고,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러하듯 대학, 취업, 또 결혼 등 일련의 과정을 겪다 보면 하나, 둘 자식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자녀들이 떠난 빈 둥지에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손때 묻은 가구들과 아이들의 추억만 남은 공간에 어느 듯 노년에 이른 우리들의 모습과 맞닥뜨리게 된다.

새벽 산책길에는 오늘도 한여름의 전령사 백일홍 나무 꽃이 길가에 나란히 피어있다. 아주 옛날의 기억 한 조각이 문득 떠오른다. 신실한 불교 신자였던 엄마가 어느 깊은 산자락에 자리 한 산사에 불공을 드리려 가면, 어린 나는 곧잘 엄마를 따라 나서곤 했었다.

여러 곳의 법당을 들락거리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갈한 절 안 마당에 몇 그루의 새색시 같은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던 기억이 목백일홍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일명 ‘배롱나무’라고도 불리는 목백일홍은 분홍색, 연보라색, 붉은색, 그리고 흰색 꽃들이 부처의 부귀영화란 꽃말처럼 백일 동안을 피었다 진다고 하여 백일홍이라는데, 내가 처음 백일홍을 접했던 곳이 특이하게도 절 마당이라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나 보다. 한국에서 인상 깊게 보았던 백일홍 나무가 이곳 메릴랜드에서도 더욱 다양한 빛깔로 동그스름하고 아기자기하게 피어 눈길 닿는 곳마다 여름을 꽃피우고 있다.

무덥고 긴 여름 하루하루를 외출하기도 쉽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요즈음 집안에서 필요 없는 짐들을 정리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사철 입던 옷가지를 그 동안 손질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망설이다가 쌓아두었던 것들을 이제는 단호히 버리기로 작정하며 일손을 놀린다. 팔십 줄을 훨씬 넘긴 지인 한 분이 언젠가 넋두리마냥 넌지시 던지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일찍이 젊은 시절부터 아껴둔 돈으로 그림이나 예쁜 그릇이나 장식품을 수집해 두었던 물건들이 이제는 주인을 닮아 빛바랜 골동품이 되어, 자식들도 세대차이, 취향차이로 물려받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마음의 짐이 되어 틈틈이 정리하게 된단다.

오늘따라 여기저기 눈에 띄는 자질구레한 살림도구와 그릇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함께 한 손때 묻은 물건들을 이제는 버려도 그다지 아깝지 않은 것들이란 생각이 들어 한층 홀가분하다. 어쩌면 한여름 햇살이 뜨거울수록 더 풍성하고 화려하게 피었다 지는 저 꽃들도 우리 인생을 닮은 듯, 지금 백일홍 꽃나무가 울긋불긋 가로수 길 위에 한껏 예쁜 꽃물을 들이고 있다.

<윤영순 /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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