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7일 워싱턴 DC 한국전쟁 기념공원 내 참전용사 ‘추모의 벽’이 착공 15개월만에 준공식을 가졌다. 추모의 벽은 높이 3.2피트, 둘레 164피트에 미군 전사자 3만6,634명, 카투사 전사자 7,174명의 이름이 각인돼 있다.
이 날 전사자의 아들딸 혹은 유복자가 낳은 후손들이 현장을 찾아 벽에 이름이 새겨진 할아버지, 삼촌의 이름을 찾으며 사진으로 남은 이들을 추모했다.
26일자 한국일보에는 6.25 당시 켈로(KLO) 부대 대원 출신인 저지시티 장운재씨의 사연이 실렸다. 이북에 있던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한 16세 소년이 먹고 살기위해 들어간 곳이 켈로 부대였다고 한다.
켈로 부대는 1949년 미 극동사령부가 북한 출신 중심의 자생적 유격부대를 흡수해 만든 부대로 북한 지역 첩보 및 공작임무 수행을 위해 창설됐다. 1951년 7월 창설된 미국 8240부대에 확대개편 됐지만 비정규군이라 계급도 군번도 없이 오랫동안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잊혀진 존재였다.
KLO(Korea Liaison Office, 한국연락사무소의 약칭)는 한국전쟁동안 첩보임무 외에 게릴라전으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가명으로 계급이나 군번 없이 정보 수집활동을 했던 20대 전후 여성대원들이 다수 있었고 이들은 적진에 침투해 목숨 걸고 북한군 병력 규모, 화기 배치 등의 정보를 파악했다. 보름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인적 드문 캄캄한 산속 무덤에 기대 잠을 자기 다반사. 이렇게 얻은 정보는 미군과 국군에게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다.
전시에서 가장 위험하고 험한 임무를 수행했지만 살아남은 자도 ‘비밀을 지키라’는 교육으로 인해 살아생전 첩보원이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6.25 발발 71년이 지난 2021년 10월에 정부로부터 보상책이 마련되었지만 공식적 기록이 없다보니 스스로 부대원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절차가 쉽지 않다. 더구나 보상액이 1인당 1,000만 원 남짓이라니, 지난 세월이 허망하다.
켈로부대뿐만 아니라 지게부대도 같은 처지이다. 6.25 당시 많은 접전지가 산악지형이라 전투 물품 운반에 어려움을 겪은 미국은 한국군에 인력 지원을 요청했다. 이른바 한국 노무단 (Korea Service Corps)이다. 하루에도 수차례 오르내려야 하는 산악지대 군수품 수송에 일명‘ ‘조랑말 부대’와 ‘지게 부대’가 맡았다.
미군들은 지게가 A를 닮았다고 A Frame Army라 부르기도 했다. 10대 소년부터 60대 노인까지 민간인 출신 노무단원들이 직접 포탄을 들고 메고 격전지 속을 걸어서 운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들이 내려올 때는 부상병을 지고 오기도 했다.
‘허리를 굽히고 앞만 보고 걸어라’는 지침대로 전투가 치열할 때는 한숨도 못자며 포탄을 날랐고 졸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포탄만 아니라 후방의 여성들이 만든 주먹밥도 날랐다. 여름에는 주먹밥이 쉴까봐, 겨울에는 얼까봐 숨가쁘게 고지로 뛰어올랐다.
당시 연인원 30만 명이 투입된 지게 부대원의 활약에 대해 미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은 ‘ 만일 지게 부대가 없었다면 최소한 10만 명의 미군을 추가 파병했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종전 후에도 이들은 죽음을 무릅쓴 무용담을 자랑하지 않았다. 비정규군 무명용사, 한때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진 존재가 된 상실감과 고통은 평생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서 80세 후반이 된 이들은 지난날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저 경험을 나누고자 할 뿐이다.
이름도 군번도 없지만 나라를 위한 봉사는 당연하다 생각했고 충성심도 그만큼 깊었다. 음지에서 일하며 허리 굽혀 지게를 짐으로써 숱한 생명을 구해낸 이들, 업적은 크되 겸손하기 짝이 없다. 서로 잘 났다고 싸우고 끊임없이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요즘의 많은 사람들이 이들로부터 겸손과 배려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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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