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에 은퇴 후 심한 우울증을 겪는 분이 있다. 옛 직장동료들은 물론 평소 자주 어울리던 친구들과도 거의 만나지 않는다. 외부와의 교류를 차단한 채 스스로 고치 속으로 들어갔다.
은퇴는 해방인 동시에 막막함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소의 멍에처럼 평생 묶여 지내던 생업에서 벗어나니 해방감이 크다. 동시에 수십년 길든 일의 중압감이 사라지니 무중력 상태로 내몰린 듯 허허롭다. 숨 돌릴 틈 없이 따라붙던 일, 일, 일들이 사라졌으니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원 없이 여행하고 골프 치는 재미도 잠깐이다.
개학을 앞두고 백투스쿨 세일이 한창이다. 아득히 먼 옛날의 ‘개학’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새 옷 입고 새 신 신고 새 가방 메고 새 교실에 들어가면 새 선생님과 새 친구들이 거기 있었다. 새 날이 펼쳐졌다. 새 학년은 새로운 모험의 시작,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백지의 1년이 주어졌다. 그렇게 새 백지들을 받아들며 우리는 초중고 대학을 마치고, 취직을 하고 승진의 사다리를 오르며,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키우며 인생 스케치북에 각자의 그림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는 “그동안 수고 많았다”며 사회가 선을 그어주는 것이 은퇴다. 문제는 은퇴가 스케치북을 덮는 순간이자 거대한 새 스케치북을 받아드는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이전에는 과제들이 주어졌지만 이제는 과제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채워 넣어야 할 스케치북이다.
60대 중반 은퇴하면 기대여명은 대략 30년. 생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노년은 더 이상 인생의 저녁이 아니라 길고긴 오후이다. 인생 다 살았다고 우울해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길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며 환대해야 할 시간이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병마나 저승사자가 찾아들면 끝나는 시한부이다.
그런 맥락에서 베이비부머들 사이에 요즘 뜨고 있는 것이 ‘은퇴 그만두기(unretire)’이다. 가능한 한 오래 현직을 유지하라, 이미 은퇴했다면 뭔가 새로운 일을 찾아 은퇴를 접으라는 것이다. 새 일을 위해서는 먼저 삶의 목적을 찾아야 한다고 조지 저지안이라는 노년 전문 컨설턴트이자 베스트셀러 저자는 말한다.
상업용 부동산과 재정분야 전문가로 일했던 그는 15년 전 은퇴를 당했다. 나이 52살에 뼈 암 진단과 함께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의사의 선고는 빗나갔지만 이후 이어진 은퇴생활을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아침에 느지막하게 일어나고 오후에 낮잠 자며, 하는 일 없이 보내는 날들이 너무나 갑갑하고 지루했다. 삶에 대한 의욕과 에너지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정신건강은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고 결론 내린 그가 시작한 일이 ‘은퇴 항거’이다. 은퇴자들이 새로운 열정과 목적을 가지고 할 일을 찾도록 도움으로써 은퇴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을 그는 노년의 커리어로 삼고 있다.
그가 60세 이상 은퇴자 1만 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은퇴생활 중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세 가지다. 첫째는 일이 사라진 것. 직업을 천직으로 여기며 좋아하던 사람들은 특히 상실감이 크다. 둘째는 정체성 상실. 수십년 직장을 축으로 형성된 정체성이 은퇴와 함께 사라지면서 존재감이 무너진 느낌이다. 셋째는 건강문제. 지병이 악화해 고통 속에 죽음을 맞게 될 두려움이다. 이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어떤 일, 좋아하는 일이라고 그는 믿는다.
일본인들의 삶에 깊이 녹아있는 개념으로 ‘이키가이’라는 게 있다. ‘이키루’에서 온 ‘이키’는 삶 혹은 사는 것. ‘가이’는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삶에 의미나 보람, 가치를 주는 것이 ‘이키가이’다. 누군가에게는 직장일이 이키가이고, 누군가에게는 예쁜 딸이 이키가이가 된다. 내게 ‘이키가이’를 설명해준 일본인 친구는 일본계 젊은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자신의 이키가이라고 했다. 신선한 새벽공기, 향기로운 커피 한잔, 고요한 숲속 등 살 맛 나게 하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아름다움 모두 이끼가이가 될 수 있다.
세계의 장수공동체 탐사가인 댄 뷰트너는 대표적 장수지역인 오키나와 주민들의 장수에 이키가이도 한몫을 한다고 말한다. 오키나와에서 노인들은 은퇴를 모른다. 102세의 가라테 사범은 무술 가르치는 것, 101세의 어부는 가족을 위해 일주일에 세 번 고기 낚는 것, 102세의 할머니는 증손녀를 품에 안고 돌보는 것이 이키가이다. 삶에 기쁨과 행복, 보람을 주니 멈출 이유가 없다. 좋아하는 일을 하니 건강에 좋고 장수로 연결된다.
노년이 몰고 오는 거대한 시간의 백지에 무엇을 그릴 것인가. 무엇을 하면 생에 의미가 생기고 노년이 행복할 것인가. 이키가이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키가이는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의 세 요소가 겹치는 어떤 것.
내가 잘 하고, 좋아하며, 가치와 보람을 느끼는 건 무엇인가. 그렇게 자신을 짚어보면 길이 보인다.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된다. 그 결과 평생 과학자였던 분은 노년에 시인이 되고, 교사였던 분은 커뮤니티 활동가가 된다. 망망대해 같은 시간의 바다에서 필요한 것은 목적이 있는 삶이다. 목적이 있어야 노년이 건강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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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