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서 에이든 맥카시라는 두 살배기 사내아이를 보았다. 맑디맑은 얼굴의 아이는 요즘 자동차소리만 나면 문으로 달려간다고 한다. 엄마아빠가 돌아온 줄 알기 때문이다. 아이의 부모인 케빈 맥카시 부부는 지난 4일 하일랜드 팍 독립기념 퍼레이드 총기난사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인근 옥상에서 쏟아지던 총탄 세례에 어머니가 총을 맞고 휘청 하자 케빈은 어머니가 안고 있던 아들을 받아 몸으로 감싸며 바닥에 엎드렸다. 총탄은 아빠의 몸에 박히고 아이는 무사했다. 혼자 아장거리던 아이를 이웃이 발견해 경찰에 인계했다. 화목하던 30대 부부의 가정은 순식간에 붕괴되고 아이는 고아가 되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1일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총기규제법 제정 축하행사를 가졌다. ‘보다 안전한 커뮤니티 법’이라고 명명된 이 법은 최근 잇달아 일어난 대형 총기난사 참극에 연방의회가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지난 5월 뉴욕, 버팔로의 흑인지역 수퍼마켓에서 10명, 열흘 후 텍사스, 유발디의 초등학교에서 어린이 19명과 교사 2명 … 전쟁터도 아닌 곳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줄줄이 총탄에 죽어나가자 공화당도 더 이상 총기규제를 반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규제’라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1993년 ‘돌격소총 금지법’ 이후 근 30년 만에 처음으로 6월말 연방의회는 총기규제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는 며칠 후 시카고 인근 하일랜드 팍에서 또 사건이 터졌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나들이 나왔던 시민들 7명이 죽고, 8살 사내아이가 하반신 마비가 되고, 수십명이 부상하고, 수백명이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14일 워싱턴 DC 연방의사당 앞에는 유발디와 하일랜드 팍 학살극 생존자와 희생자 가족들이 모였다. 내 가족, 내 아이들에게 일어난 일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는 없다며 연방의회에 강력한 총기규제를 촉구했다.
가장 평화로워야 할 학교가, 안전해야 할 수퍼마켓이, 퍼레이드가, 교회가 … 킬링필드로 변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구나 안다. 돌격용 반자동소총이나 대용량 탄창 판매를 금지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전쟁터에서나 필요한 무기를 민간인이 보유할 이유가 없지만, 그런 상식은 미국에서 통하지 않는다. 총기소유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가 전가의 보도로, 전국총기협회(NRA)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상식이 통한다면 어떤 변화가 가능할까. 1996년 3월 13일 영국. 스코틀랜드 북부 던블레인의 한 초등학교에 괴한이 침입, 어린이 16명과 여교사를 총격 살해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판단한 영국국민들은 총기규제 시민단체를 만들고, 던블레인 주민 중심으로 75만명의 서명을 받는 등 전국적 캠페인을 벌였다. 이듬해 영국정부는 민간인의 권총소유를 전면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효과는 확실했다. 법이 시행된 1997년부터 2020년 사이 대형 총기난사 사건은 단 3건, 학교에서는 한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1996년 4월 28일 호주. 유명 휴양지 포트 아서에서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청년이 느닷없이 무차별총격을 시작해 35명이 떼죽음을 당했다. 일명 포트 아서 대 학살극이다. 호주 정부는 자동/반자동 총기류 판매 및 수입 금지, 국민 보유 총기 70만정 사들여 폐기, 총기소유 면허 강화 등 총기개혁법을 도입했다. 그 결과 1997년에서 2020년 사이 총기면허 소지자는 48%나 줄고, 피해자 5명 이상의 총기난사 사건은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2019년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무슬림 증오 테러범들이 이슬람사원을 공격, 51명이 사망했다. 30대의 여성총리 저신다 아던은 사건 발생 엿새 만에 군대식 돌격용 자동소총 및 반자동 소총 판매를 즉각 금지하는 총기테러 방지책을 발표했다.
총기규제는 어느 나라에서나 이견이 심한 이슈이다. 호주의 경우, 미국처럼 개척의 역사가 있어서 총기보유가 당연시 되었다. 미치광이 하나 때문에 자신들의 권리를 제한 받을 수 없다며 반대시위가 격렬했다. 당시 존 하워드 총리는 살해위협까지 받았다. 영국 역시 권총보유 금지를 둘러싼 찬반대립이 심각했다. 권총사격은 당시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그럼에도 이들 나라는 상식에 기반해 마땅히 규제하고 금지할 것들을 법으로 관철해냈다.
미국에서는 무차별총격사건이 터지고 나면 총기구매가 오히려 늘어난다. 총 든 미치광이를 제압하려면 선량한 시민들이 더 무장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NRA의 핵심 주장이다. 총기구매가 너무 쉬워서 총기폭력이 끊이지 않는다는 주장은 뒷전으로 밀린다. 대형 참극이 벌어질 때마다 총기규제 목소리는 다급해지지만 그러다 흐지부지 되기를 수십년 반복했다.
그래서 제기되는 것이 신뢰의 문제이다. 총이 인구보다 많은 나라에서 누가 나를, 우리 가족을 지켜줄 것인가. 정부도 이웃도 믿을 수 없고, 자기 자신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이 총기구매를 부추긴다. 그 틈을 타고, 절대로 총을 가져서는 안되는 자들의 손에 총이 쥐어진다.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소통밖에 없다. 대화-타협-합의라는 민주적 시스템이 의회에서, 국민들 사이에서 회복되어야 한다. 이번에 제정된 총기규제법이 그 첫 걸음이 되기를 바란다. 미국의 총 사랑에 상식이 끼어들지 않으면, 책임감이라는 안전장치가 채워지지 않으면, 총성은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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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