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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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이 좋아

2022-07-13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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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전자책은 불편하다. 읽다가 앞으로 돌아가고픈 때가 한두 번이 아닌데 종이책처럼 후루룩 뒤져서 찾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손으로 터치하며 넘기다보면 짜증나기 일쑤, 다신 e북을 사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한다.

한번 쓱 읽고 지나가도 되는 대중소설류는 괜찮지만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시집, 반복해 읽고 싶은 고전과 인문학서적, 참고할 것이 많은 과학정보서, 그림과 사진이 수록된 문화예술서적은 책장을 직접 훑고 넘겨볼 수 있는 종이책이 필수다. 전자책이 요긴한 경우는 여행할 때 외에는 이제 거의 없어 보인다.

싸고, 편리하고,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각광받았던 전자책이 언젠가부터 빛을 잃고 있다. 태블릿은 사실상 성장을 멈추었고 킨들, 누크 같은 전자책 단말기는 사양길에 접어든지 오래다.


디지털과 온라인 세상이 도래하자 종이책과 서점의 종말을 예언한 사람이 많았다. 1995년 제프 베조스가 시애틀의 차고에서 온라인서점 아마존을 시작한 이래 전자상거래 혁명은 거의 모든 리테일 업종에 타격을 입혔는데 그 중에서도 서점이 가장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사실 아마존 이전에도 작은 서점들은 코스코나 월마트 등의 할인업체들과 보더스, 월든북스, B. 달튼 같은 대형 체인서점들에 밀려 문을 닫아야했다. 그리고 곧이어 이런 대형서점들도 아마존에 의해 파산했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서 폐점한 북스토어는 수천개, 대형체인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반스 앤 노블은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디지털의 습격은 여기까지, 지난주 뉴욕타임스는 이제 다시 종이책에 대한 수요가 늘고 곳곳에 책방이 들어서고 있다고 보도했다. 팬데믹 초기였던 2020년에는 많은 서점이 문을 닫았고 책 판매도 30%나 떨어졌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버텨낸 2021년 미 전국에 새로 문을 연 서점은 300여개, 매출도 10% 이상 증가했고 종이책은 8억2,700만권이나 팔렸다. 미국 독립서점상협회에 따르면 2020년 7월에 1,689개였던 회원 업소가 지금은 2,023개로 늘어났는데 앞으로 일이년 내에 200여 곳이 더 문을 열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고무적인 것은 오랫동안 서점은 백인들의 비즈니스였으나 요즘 새롭게 오픈하는 서점들은 상당수가 아시안, 흑인, 라티노, 성소수자들이 자신들의 니즈에 맞게 특화한 책방들이라는 사실이다. 한 예로 2021년 맨해튼 차이나타운에 문을 연 ‘유 앤 미 북스’(Yu and Me Books)는 아시안 이민자들과 유색인을 다룬 책들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다. 소유주인 중국계 루시 유는 “아시안 아메리칸에 대한 증오범죄가 증가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시안 이민자들의 스토리에 대한 갈증도 커가는 것을 보고 책방을 열었다”면서 불과 4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고 말했다. 이 책방은 아시안 증오범죄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일종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처하려는 사람들의 커뮤니티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또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에 개업한 ‘솔트 이터스 북샵’은 흑인여성과 소녀, 제3의 성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방이고, 텍사스주 테일러의 모바일 서점 ‘리브로스 북모바일’은 스패니시 영어 소설을, 휴스턴의 ‘킨드레드 스토리즈’는 흑인 틴에이저 소녀들의 이야기를 쌓아놓고 있다.

20년전 업계가 예측했던 종이 인쇄물과 오프라인 서점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직도 작가들은 신간을 종이책으로 발표하고 있으며 수많은 잡지와 정기간행물이 중단 없이 발행되고 심지어 창간되고 있다. 영국에서 한인 로사 박 편집장이 2012년 창간한 고품격잡지 ‘시리얼’(Cereal)은 지금까지 매호가 품절될 정도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신문 역시 구독률이 과거보다는 크게 떨어졌지만 아직도 많은 독자들은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갓 인쇄된 신문을 읽는 시간을 가장 즐긴다고들 말한다. 한 조사에 의하면 종이 독자들은 디지털 독자보다 신문을 더 오래 자세히 읽는다. 종이신문은 선정적인 낚시성 헤드라인에 걸려서 쉽게 클릭하고 금방 빠져나오는 디지털 뉴스와 본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맘에 드는 시집이 나오면 열권 스무권 정도 구입해두었다가 기회 될 때마다 가까운 친구들에게 선물한다. 사람들은 시집을 받아들면 굉장히 좋아하는데, 왠지 정서가 고양되는 느낌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부담이 없고.

책은 온라인 서점이 아닌 한인타운의 오래된 책방 ‘해피북서점’에서 구입한다. 새 책과 중고를 함께 파는 이곳은 주위 친구들도 자주 이용하기 때문에 가끔 책 사러 가면 아무개가 무슨 책을 주문했다는 귀동냥을 하기도 하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죽치기도 하는 모습에 사랑방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오래된 책의 향기가 스며있는 이런 동네서점이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커뮤니티의 의무일 것이다.

책은 동경의 대상이 되는 소비재다. 정신이 담긴 종이뭉치,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추구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손에 책을 들고 종이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경험은 디지털 독서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종이냄새, 책장 넘기는 소리, 손가락에 닿는 촉감… 읽다가 밑줄을 긋거나 귀퉁이를 접을 수 있는 종이책은 감각적이고 아름답다. 우리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을 더 좋아한다. 4차 혁명 시대라지만 아직도 우리의 감성을 여는 것은 아날로그다. <논설실장>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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