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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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飯酒) 문화

2022-07-10 (일) 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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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전 내가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으로 일하던 때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매년 한 번씩 교육청의 고위 교육자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한인 학생들을 비롯해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페어팩스 카운티 공립학교의 교육자들이 한국의 문화와 교육제도를 경험하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에 가면 일선 학교들도 방문하고 교육자들이나 교육청 행정가들도 만난다. 그러면서 미국과는 또 다른 교육 방식과 교육에 대한 생각도 접한다. 식사 대접도 종종 받는데 그 때 미국인 교육자들에게 약간은 놀랍게 다가오는 것이 한국의 반주(飯酒)문화이다.

저녁 식사 뿐 아니라 간단한 점심 식사 때도 해당 모임의 호스트가 종종 술을 권한다.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고 많은 양은 아니더라도 맥주 한 두 병 정도는 자연스럽게 나누게 된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미국인 교육자들도 나중에는 대부분 호스트의 권유를 피하지 않는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고 했다며 맞추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교육자들이 이 곳 페어팩스를 방문할 때는 식사를 대접하더라도 술을 권하기가 힘들다. 역시 이 곳에서는 이 곳 규정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교육위원으로 있으면서 겪었던 술 관련 에피소드 두어 개가 최근에 생각났다. 하나는 제법 오래 전 교육감이 관련된 경우였다. 평소에 교육감에게 종종 비판적이었던 어느 교육위원이, 교육감이 교육위원회 회의에 술 취한 채로 참석했다고 불평했다. 술 냄새도 풍겼고 발언할 때 말 끝도 흐려지는 게 취했다는 것을 판단하기에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교육감이 회의석 배정 상 자신의 바로 옆에 앉는데 평소에도 껄끄러운 사이였기에 그 날은 더욱 불안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교육감의 설명을 들으니 당일 회의 전에 손님과 저녁 식사를 했는데 그 때 포도주를 약간 마셨다는 것이다. 자신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옆 좌석에 앉아 있던 교육위원이 다르게 느꼈다면 죄송하다며 사과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무리 중요한 손님을 만나더라도 당일의 업무가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겠노라고 약속했다.

또 다른 한 번은 내가 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매년 한 번씩 교육위원회 사무실 스탭들의 수고에 감사하는 점심 식사를 가졌다. 식사비는 교육위원들이 나누어 부담했다. 식사가 끝나면 의장이 스탭들에게 반나절 휴가를 허용하곤 했다. 내가 의장으로 있을 때에도 항상 그렇게 반나절을 쉬게 해 주었다. 스탭들은 다른 것 보다 그렇게 시간을 선물로 주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 날 점심 식사 때 반주로 포도주를 두어 병 주문했다. 여럿이 나누어 마시니 한 사람에게 한 잔 정도의 양이었다. 그런데 스탭들이 그 가운데 최고 높은 직에 있는 상사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일부는 교육위원회 의장이 허락하는 것이니 마셨지만 그냥 잔에 따라만 놓고 입에 대지 않는 스탭들도 제법 있었다. 식사 후 모두 퇴근해도 좋다고 휴가를 허락했는데도 말이다. 그 만큼 퇴근 전 금주 규정에 민감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모습을 최근에도 보았다. 얼마 전 토마스 제퍼슨 과학고 체육관 현판식을 위해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교육청 관계자에게 감사의 뜻으로 점심 식사를 대접했다. 체격이 건장한 이 미국인에게 한국 바비큐를 권하니 좋다고 했다. 그러나 맥주 한 잔 하겠느냐고 물어 보았을 때는 아직 그 날 일이 끝나지 않아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서 그냥 고기만 열심히 구어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참 그러다 보니 이야기 내용도 깊어져 갔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혹시 맥주 한 잔 안하겠느냐고 물었다. 그랬는데 내 얼굴을 잠깐 쳐다 보더니 그러자는게 아닌가! 바로 한국 맥주 두 병을 주문했다. 그리고 맥주가 나오는 사이 그 교육청 관계자는 교육청에 반일 휴가 신청을 냈다. 점심 식사 후 퇴근한단다. 그러니 편하게 마셔도 된다면서 말이다. 참, 철저하구나! 이게 바로 미국의 힘인가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각자 맥주 두 병씩 소화하는게 어렵지 않았다.

<문일룡 변호사,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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