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복자로 태어난 미국의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1829-1837)은 미국의 독립전쟁으로 두 형을, 질병으로 어머니를 모두 잃고 14세에 고아 신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타고난 근면과 성실, 불굴의 투지로 변호사와 주 대법관, 대농장 지주, 상하원 의원, 군인 등을 거쳐 끝내 백악관으로 입성하여 연임에도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20달러짜리 미국 지폐에 그려진 잭슨의 곱슬머리 중년 신사 모습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만 이런 인상과 달리 불법이었던 1 대 1 권총 대결을 무려 100번 넘게 벌였을 정도로 호전적이고 불같은 다혈질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잭슨은 변호사 시절부터 상대편 변호사와 법정에서 냉정한 법리로 다투기보다 야외에서 1 대 1 권총 대결로 문제 해결하기를 더 선호했다. 그런 나머지 경마로 인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권총 대결에서는 존 마셜 연방대법관의 제자 찰스 디킨슨(Charles Dickinson) 변호사를 사살하기까지 했다.
잭슨의 호전적 기질은 미국의 독립전쟁 후 1815년 테네시주의 잭슨 민병대가 세계최강 영국군과 다시 한판 붙은 뉴올리언스 방어 전투를 맞아 진가를 발휘하면서 잭슨을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 주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병력이 거의 두 배나 많았음에도 2,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잭슨의 민병대 사상자는 100명도 채 되지 않았던 것. 엄격하고 대담한 지휘 스타일로 뛰어난 지장임을 인정받은 잭슨은 ‘Old Hickory(오래된 히코리 나무)’라는 애칭과 함께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아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잭슨은 장군과 대통령 이전에 학교 문턱이라곤 가보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변호사를 거쳐 테네시주의 대법관까지 역임한 뛰어난 법률가이기도 했다. 한 전기 작가에 의하면 “가장 법을 어기는, 가장 법을 준수하는 시민”이라는 상반되고 모순적인 평가를 했을 만큼 잭슨은 법이 가진 권능뿐 아니라 그 한계점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 예로 당시 권총 대결 법칙에선, 서부영화에서 두 총잡이가 마주 보며 심판의 카운트에 맞춰 재빨리 총을 뽑는 것과 달리, 서로 번갈아가며 총을 쏘았는데 잭슨은 자신의 차례에 총이 불발되자 상대방의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장전해 총을 쐈다고 한다.
권총 대결로 인한 살인은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던 시절이라 이렇게 하더라도 형사재판에 넘겨지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법의 맹점을 이용했다.
고아로 성장기를 겪으면서 이런 눈치와 요령들이 몸에 밴 그는 대통령이 되자 자신의 정치적 입지나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법을 과감하게 무시하기도 했다.
지난 칼럼 ‘눈물의 길 새로운 길’(2020.7.29.)에서 다룬 바 있듯이 조지아주가 인디언 부족들에게 불리한 법을 만들어 금광이 발견된 원주민 땅을 빼앗기 시작하자 존 마셜 연방대법원장은 ‘각 주의 법률은 인디언 보호령 안에서는 효력이 없다’며 인디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잭슨 대통령은 “마셜이 그런 판결을 내렸다고? 그럼 자기가 그렇게 집행해 보라지!”라며 대법원의 결정을 묵살하고, 오히려 인디언들을 오클로호마주로 강제 이주시켰던 것이다.
미국 정치사적으로 보면 잭슨은 평등주의를 강조, 지주들만 가지고 있던 투표권을 모든 백인 남성에게 확대하여 ‘잭소니언 민주주의’를 꽃피운 ‘서민 대통령’이었다. 반면에 흑인과 인디언에 대해서는 가혹한 인종차별주의자였다.
최근 이에 대한 비판 여론으로 그의 초상화를 흑인 여성운동가인 해리엇 텁맨(Harriet Tubman)으로 교체하자는 움직임이 가시화되면서 1928년부터 20달러 지폐의 앞면을 지켜온 잭슨의 모습이 우리 곁에서 사라질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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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경락/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