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소년 임윤찬의 밴 클라이번 피아노콩쿠르 우승 소식에 아직도 흥분이 가시지 않는다. 한국인의 국제 콩쿠르 우승은 이제 드물지 않으니 그 때문에 흥분한 것은 아니다. 경탄을 넘어 경악하게 된 건 대회 연주실황을 보면서부터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임윤찬이 예선, 준준결승, 준결승, 결승 무대에서 연주한 음악들을 유튜브를 통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한결같이 “말도 안 돼, 열여덟 살짜리가…”라며 전율했을 것이다.
그렇다. 말도 안 되는 연주였고, 차원이 다른 연주였다. 결코 틴에이저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세계 속에 임윤찬은 들어가 있었다. 거장의 탄생을 초기에 목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놀라운 것은 그 재능과 실력만이 아니었다. 무대에서의 침착함과 안정감, 건반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 쉬는 마디에서 충분히 쉬어가는 여유, 도대체가 긴장되거나 불안한 구석이 조금도 없이 음악과 자신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몰아지경의 연주를 그는 하고 있었다.
리사이틀에서는 혼자 면벽수도 하듯 피아노를 쳤고, 협주곡에서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음악의 정수를 끌어내는 마법적인 연주를 펼쳤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를 아는 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18세 소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았다. ‘108세 같은 18세’ ‘천재를 넘어 기인’이라는 찬탄이 나오는 이유다.
임윤찬은 비교적 늦은 나이인 7세 때 동네 학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들이 태권도장에 다닐 때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어서 피아노학원에 등록했는데 그러다보니 음악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는 11세 때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하면서 음악영재로 두각을 나타기 시작했고, 15세 때 윤이상 국제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하면서 ‘괴물 신동’으로 부상했다. 2020년 예원학교를 수석 졸업한 뒤 고교과정을 뛰어넘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했는데 스승 손민수 교수는 “윤찬이는 즉흥적이고 본능적이면서도 절제할 수 있는 밸런스를 갖췄고, 매일 새 곡을 하고 싶어하는 아이”라면서 “카멜레온처럼 변할 수 있고, 바로크부터 현대까지 모든 장르를 이해하고 잘 연주할 수 있는 큰 스케일의 연주자”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이번 콩쿠르에서 임윤찬은 4단계 경쟁에서 총 11곡을 연주했는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부터 리스트, 쿠페랑, 라흐마니노프, 스크랴빈, 그리고 현대곡(스티븐 허프의 ‘팡파르 토카타’로 신곡연주상도 수상)까지 다양한 시대를 오가며 압도적인 기량을 펼쳐보였다.
4년에 한번 열리며 ‘피아노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연주 스케줄이 엄청나기로 유명하다. 올해는 388명의 피아니스트가 지원해 예선을 통과한 30명이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실력을 겨뤘는데 예선과 준준결선(18명)에서 각각 40분의 독주회, 준결선(12명)에서 60분 독주회와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10개중 택일) 협연, 최종 결선(6명)에서는 28개 피아노협주곡 중 2개를 선택해 마린 알솝이 지휘하는 포트워스 심포니와 협연해야했다. 17일 동안 3회의 리사이틀과 3개의 협주곡을 연주해야하는 초인적인 스케줄이다.
여기서 화제가 된 임윤찬의 연주는 준결선에서의 리스트 ‘초절기교 12개 연습곡’과 결선의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이었다. 특히 악마적 기교를 요구한다는 고난도의 ‘초절기교 연습곡’ 전곡을 한시간 넘도록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리 연주한 무대는 현재 유튜브 100만뷰를 기록했고 “미쳤다”는 댓글이 수없이 달려있다.
역시 고난도로 유명한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에서 임윤찬은 지휘자 마린 알솝과 기막힌 교감을 이루며 연주를 풀어나갔고, 하이라이트인 3악장에서는 감동의 파도가 물결치며 정점을 향해 치달아 폭발하는 연주가 너무나 드러매틱해서 연주가 끝났을 때 청중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고, 알솝조차 감격한 듯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생중계됐다. 라흐마니노프 3번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런 연주는 처음이었다.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첫 한국인 입상자는 2005년 조이스 양으로, 당시 최연소(19세)로 은메달을 수상했다. 2009년에는 손열음이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2017년 선우예권이 금메달을 수상했다. 국제콩쿠르에서 두 대회 연속 한국인이 우승하기는 처음으로, 임윤찬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밴 클라이번 수상자들은 상금도 엄청나지만(금 10만달러, 은 5만달러, 동 2만5,000달러) 3년 동안 재단으로부터 집중적인 커리어 매니지먼트를 받게 된다. 전 세계를 무대로 연주회가 짜여지는 것은 물론 음악가로서 재정관리와 음반계약, 멘토십, 미디어 훈련까지 지원받는다. 이 스케줄에 따라 손열음은 수상 다음해인 2010년 5월 벤추라 뮤직 페스티벌에 왔었고, 선우예권은 2017년 가을 오렌지카운티의 퍼시픽 앰피디어터 무대에서 라흐마니노프 2번 협주곡을 연주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1.5세 조이스 양은 수상 이후 할리웃보울과 디즈니홀에서 LA필하모닉과 협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임윤찬의 연주도 머잖아 남가주를 비롯한 미국 여러 도시에서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직 그는 너무 어리다. 한 인터뷰에서 “산에 들어가 피아노만 치고 싶다, 그저 음악만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고 조금 걱정이 앞선다. 그가 글렌 굴드나 라두 루푸처럼 너무 멀리 가지 않고, 우리 곁에 오래 남아 천상의 연주를 들려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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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