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영화 ‘바이스’(Vice)는 딕 체니 전 부통령의 생애를 그린 블랙코미디다. 제목 ‘바이스’는 ‘부’통령을 뜻하기도 하지만 ‘악’이란 뜻도 가진 중의어기 때문에 제목만 보아도 딕 체니가 역사에 남긴 악영향을 조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딕 체니는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에 국방장관을 지냈고, 아들 부시 때는 부통령으로서 8년 동안 막후에서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이다. 그는 부시의 러닝메이트 요청을 계속 거부하다가 최종적으로 “외교와 국방에 관한 권한까지 부통령에게 위임하겠다”는 약속을 듣고서야 수락했다. 그리고 이후 그가 내린 결정들은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북한과 이란, 이라크 등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압박정책을 취하도록 했고,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키게 했다. 특히 그는 사담 후세인이 대량 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며 알 카에다와 협력하고 있다고 강력 주장하여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는데, 훗날 이 두가지 의혹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됐다. 이 외에도 해외포로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심문행위를 허용함으로써 수백건의 고문, 학대, 살인이 자행되었는데 이 때문에 워싱턴포스트로부터 ‘고문 부통령’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영화 ‘바이스’를 보면 부시는 천하에 바보멍청이고, 딕 체니는 완전 악인으로 묘사된다. “부시는 얼굴마담이고 체니가 진짜 대통령”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던 당시 상황이 신랄하게 그려지는데, 살아있는 전 대통령과 부통령을 이토록 나쁘게 극화해도 되는 건지, 영화를 보면서 꽤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정계 은퇴 후 지금까지도 떨치지 못한 딕 체니의 오명과 악명이 어쩌면 그의 딸 리즈 체니 연방하원의원(공화, 와이오밍) 덕분에 얼마큼이나마 상쇄될 지도 모르겠다. 리즈 체니(55)는 현재 생중계로 열리고 있는 ‘1월6일 국회의사당 난입사건 청문회’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이 청문회는 2021년 1월6일의 의회폭동을 조사해온 하원특별조사위원회가 지난 9일부터 지금까지 4회에 걸쳐 열었으며, 내일(23일) 5차 히어링 후 9월에 마지막 청문회가 있을 예정이다. 9명의 멤버로 구성된 조사특위는 그동안 1,000회 이상의 증언 청취를 통해 수천 장의 자료를 재구성하여 트럼프의 대선결과 부정이 폭동을 촉발하게 된 경위를 하나하나 밝혀내고 있다.
그런데 이 조사특위의 멤버 9명중 공화당 의원은 단 2명, 체니 의원과 애덤 킨징거 의원(일리노이)이다. 조사특위 부위원장인 체니 의원은 청문회 첫 날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 결과를 뒤집기 위한 7단계 계획을 몇 달에 걸쳐 세심하게 조직하고 감독했다”면서 “참모들이 부정선거 주장을 반대하고 만류했으나 폭도를 소환해 결집시키고 이 공격의 불을 붙였다”고 폭로했다.
체니와 킨징거 의원은 트럼프 추종자들로부터 살해 협박을 받고 있으며 이제 정치생명이 끝났다고 정가에서는 보고 있다. 킨징거는 아예 재선 출마를 포기했고, 체니는 8월16일 와이오밍주의 예비선거에서 패배가 거의 확실하다. 얼마 전 트럼프가 공화강성인 와이오밍주로 날아가 “체니를 축출하라”고 선동하며 다른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리즈 체니가 처음부터 트럼프의 저격수였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보수적인 네오콘으로서 낙태를 반대하고, 국경장벽 건설에 찬성했으며, 오바마케어 폐지 찬성, 총기규제 반대 등 트럼프 어젠다의 94%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트럼프가 2020 대선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결국 의회폭동까지 일으키자 완전히 돌아서 1월13일 트럼프의 두 번째 탄핵에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탄핵에 찬성한 공화당 의원은 총 10명이었으며, 그때만 해도 공화당 지도부에서는 그녀를 “신념과 용기를 가진 보수의 지도자”라며 치켜세웠다. 부시 전 대통령은 딕 체니 전부통령에게 전화해 딸의 행동에 감사를 표하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기류는 곧 정반대로 바뀌었다. 트럼프의 영향력이 건재하고 그의 지지에 힘입어 의원직을 지키려는 공화당 의원들이 늘어나면서 체니는 외톨이 왕따가 되었고, 결국 5월에 공화당내 서열 3위인 의원총회 의장직에서 쫓겨났다. 11월에는 와이오밍 공화당에서도 제적당했다. 지난 2월 공화당전국위는 1.6 사건을 “합법적인 정치담론”으로 규정했고 하원조사특위에 참여한 체니와 킨징거를 압도적 투표로 견책했다.
거의 모든 공화당 의원들이 정치생명 연장을 위해 말을 바꾸고 1.6 사건에 대해 거짓으로 일관하는 동안 체니는 “트럼프는 미국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협이 되는 인물이며, 새빨간 거짓말과 헌법을 (함께) 끌어안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비난의 수위를 낮추지 않았다. 지난 1년반 동안 타협하지 않고 당파성과 진영논리를 떠나 민주주의의 원칙과 소신을 지킨 그에게 지난 4월 존 F. 케네디재단은 2022 ‘용감한 인물’상을 수여했다. 일부 언론은 그녀가 살아있는 양심이며 진정한 애국자요,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청문회 첫날 리즈 체니는 트럼프에 빌붙어있는 의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밤 나는 공화당 동료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은 옹호의 여지가 없는 자를 옹호하고 있다. 언젠가 트럼프는 사라지겠지만 당신들의 불명예는 영원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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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