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페라 가수의 외모

2022-06-01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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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20대초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을 때 그녀의 몸무게는 200파운드(91kg)가 넘었다. 그의 기막힌 목소리에 음악계는 환호했지만, 얼마 안 있어 뚱뚱한 몸매가 커리어에 장애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키가 172cm인 칼라스 자신도 무대에서 거구의 몸으로 연약한 여주인공을 노래하는 일이 편치 않았다고 훗날 고백했다.

서른살 무렵 그녀는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한다. 1953년 영화 ‘로마의 휴일’을 본 것이 계기였다. 개미허리의 오드리 헵번에게 매혹된 칼라스는 그녀의 모든 것을 따라하면서 10개월 만에 80파운드(36kg)를 감량했다. 늘씬하고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된 그녀를 처음에는 주위에서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극적 변신이었다. 그 후 20세기 최고의 가수가 된 마리아 칼라스의 눈부신 음악인생과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바그너 전문가수 데보라 보이트도 몸무게 때문에 호된 시련을 겪었다. 체중이 100㎏이던 2004년, 그녀는 런던 로열오페라로부터 공연계약을 취소당했다. 슈트라우스의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에서 주역을 맡기로 돼있었는데 현대화된 프로덕션의 의상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극장 측은 대신 무명의 날씬한 소프라노 안네 슈바네빌름을 캐스팅했고, 이 사건은 음악계에 크나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잖아도 무릎관절에 고혈압과 당뇨 문제를 갖고 있던 보이트는 그 굴욕의 충격으로 위장 절제수술을 받았고 그 결과 100파운드(45㎏) 감량에 성공했다. 허리사이즈가 66인치에서 32인치로 줄어든 보이트는 4년 만에 로열오페라와 똑같은 작품을 계약함으로써 다시 한번 화제가 되었고, 이후 전성기를 맞아 세계 오페라무대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오페라 가수에게 외모는 얼마나 중요한 조건일까? 지난달 21일 개막한 LA오페라의 ‘아이다’(Aida)를 보고나서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됐다.

‘아이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베르디가 만년에 심혈을 기울여 쓴 걸작, 그랜드오페라 스타일의 스펙터클한 무대, 트럼펫 소리 빵빵한 개선행진곡, LA오페라가 16년 만에 올리는 공연이었다. 과연 베르디 음악은 너무나 좋았다. 오케스트라, 합창단, 가수들 모두 훌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는 내내 재미있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유는 무대 위 가수들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아이다는 이디오피아 공주였으나 이집트로 끌려와 암네리스 공주의 몸종이 되었다. 그런데 개선장군 라다메스가 아이다를 사랑하고, 암네리스 공주는 장군을 사랑하니 비극적인 삼각관계 러브스토리가 펼쳐진다. 적국의 장수가 목숨 바쳐 사랑할 만큼, 또 적국의 공주가 자기몸종으로 삼을 만큼 아름답고 고귀한 아이다 역을 뚱뚱하고 작딸막한 흑인 소프라노(라토니아 모어)가 노래했다. 그녀의 라이벌 암네리스 공주 역시 못지않게 비대한 메조소프라노(멜로디 모어)였고, 라다메스 장군과 대제사장 역시 배 둘레가 엄청난 흑인 테너(러셀 토마스)와 베이스(모리스 로빈슨)였다. 뿐만 아니라 이집트 왕과 아이다의 아버지 이디오피아 왕까지, 출연진 전체가 어찌나 풍만하던지 무대가 굴러가는 듯해 도무지 오페라에 몰입이 되지 않았다.

2015년 보았던 벨리니의 ‘노르마’(Norma) 생각이 났다. 신전의 두 여사제가 로마총독을 사랑하는 역시 삼각관계 오페라다. 노르마 역의 안젤라 미드, 아달지사 역의 제이미 바튼, 두 소프라노는 노래를 환상적으로 잘했지만 둘 다 너무나도 뚱뚱해서 도대체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그때도 로마총독이 러셀 토마스, 남제사장이 모리스 로빈슨이었으니 역시 다 같이 굴러다니는 무대였던 것이다.

오페라 가수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위대한 소리는 위대한 몸통에서 나온다”고들 했고 “뚱뚱한 여자가 노래 부르기 전까지는 오페라가 끝난게 아니다”(The opera ain‘t over until the fat lady sings)라는 속담이 있었을 만큼 과거의 청중은 가수의 몸집에 관대했다. 사실 성량 풍부하고 윤택한 목소리를 내려면 후두와 성대 조직이 두툼하고 횡경막이 강해야하므로 목두께와 가슴둘레가 넓어지면서 자연스레 몸집이 커질 수밖에 없다는 이론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요즘엔 배우나 모델 뺨치게 날씬한 몸매를 가졌는데도 기막히게 노래하는 가수들이 많은걸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오페라는 음악만 듣는 공연이 아니다. 멋진 의상과 세트를 갖춘 무대에서 가수의 노래와 연기를 지켜보는 즐거움이 더 큰 종합공연예술이다. 게다가 지금은 HD 라이브와 온라인 스트리밍 시대, 오페라 가수는 노래 외에도 ‘적절한’ 외모가 요구된다. 어느 정도의 몸집은 불가피할 수 있지만, 민망할 정도로 비만하여 무대에서 연기가 부자연스러울 정도라면 오페라를 떠나 리사이틀과 콘서트가수로 나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제시 노먼과 몽세라 카바예가 오페라무대에 서지 않고 콘서트만 고집했던 것처럼.

유럽과 메트 오페라의 공연 스트리밍을 보면 늘씬하고 노래 잘하는 소프라노, 메조, 테너, 바리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가수들은 개런티가 비싸다. 팬데믹 여파로 재정이 어려운 LA오페라를 더 많이 후원하고 더 자주 찾아야 더 좋은 공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이다’는 오는 12일까지 4회 공연이 남아있다. 6월4일 오후 7시30분 공연은 산타모니카 피어, 산타 클라리타 뉴홀 파크, 포모나 페어플렉스 세 곳에서 LED 스크린으로 공연실황을 무료 중계한다. www.laopera.org/performances/2022-aida-simulcast-events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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