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할리웃 보울, 100년

2022-05-18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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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티 메이슨 카터(Artie Mason Carter, 1881-1967)는 미주리 주 출신의 피아니스트였다. 어린 나이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인 그는 틴에이저 때 미술과 음악의 2개 학사학위를 땄고, 결혼 후 빈에서 3년간 체류하며 피아노를 더 공부했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피아니스트로서가 아니라 훗날 ‘할리웃 보울의 어머니’라 불리는 더 위대한 일에 헌신하게 된다. ‘음악은 선택된 소수만이 아니라 인종, 교육수준, 사회적 위상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어야한다’는 강한 신념 때문이었다.

제1차 대전 직전에 빈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카터 부부는 당시 막 영화산업이 꿈틀거리던 할리웃에 정착했고, 남편이 개업의로 일하는 동안 아티는 음악을 가르치며 커뮤니티 봉사에 몰두했다. 20세기 초 LA 인구는 100만명, 대도시로 급속히 팽창하고 있었으나 이렇다 할 공연장도, 연주단체도 없었다. 그 즈음 조직된 ‘할리웃 커뮤니티 코러스’에 조인한 아티는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여 14개월 만에 단원이 35명에서 900명으로 불어나는 놀라운 성취를 이뤘다.

그리고 이 대형 합창단의 파워를 이용해 당시 창단된 지 얼마 안 된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는 부활절 새벽예배를 기획했다. 1921년 3월27일 할리웃 힐스의 산자락, 잔디가 무릎까지 올라오는 숲에서 최초의 야외음악예배가 열렸다. 거의 1만명이 참석하는 대성공을 거둔 이 야외음악회는 ‘할리웃 보울’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때부터 아티는 남녀노소 누구나 음악을 즐길 수 있는 곳, 정장을 입고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곳, 여름에 비가 오지 않는 남가주의 기후를 활용한 야외음악당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자신의 다이아 반지를 팔았고, 합창단원들에게 도네이션을 호소했으며, ‘하루 1센트’ 캠페인을 벌이면서 할리웃 주민들에게 보울 부지 구입을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그런 한편 그녀는 삽을 들고 숲에서 잡초를 뽑고 청소하고 제라늄을 심었다. 마침내 15개월 후, 펀드가 조성됐고 임시 조립된 무대와 1,500명이 앉거나 선 채로 연주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됐다.

1922년 7월11일, 미국 최초의 숲속 야외음악당에서 LA 필하모닉(알프레드 허츠 지휘)이 연주하는 미국 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어 바그너, 차이코프스키, 브람스, 그리그, 크라이슬러, 로시니의 음악이 연주됐다. 제1회 할리웃 보울 섬머 시즌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티켓 가격은 쿼터(25센트), 열악하기 짝이 없는 공연장이었지만 ‘별빛 아래 교향곡’(Symphonies under the Stars)이란 제하의 프로그램에 사람들이 몰려왔고 첫 시즌에 15만명이나 참석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났다. 잡초가 가득했던 할리웃 보울은 최첨단 사운드 시스템과 LED 스크린, 1만8,000석의 박스와 벤치가 설치된 초대형 야외공연장으로 변모했다. 클래식 뿐 아니라 팝, 록, 레개, 재즈, 뮤지컬, 오페라, 발레, 영화음악이 모두 공연되는, 문자 그대로 남녀노소 모두가 부담없이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전천후 공연장이다. 지난 100년 동안 이곳에서 전설적인 연주자들이 데뷔했고, 수많은 역사가 창조됐다. 오늘도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이 스테이지에 서기를 갈망하는 꿈의 무대, 음악인들의 순례지요, 모든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열린 공간이다. 한 여인의 꿈과 집념이 이뤄낸 놀라운 결실을 다같이 목도하고 있다.

지난 11일 할리웃 보울의 100번째 시즌을 축하하는 파티가 보울 스테이지에서 열렸다. LA필하모닉은 매년 5월 미디어와 후원자들을 초청하여 시즌 홍보 파티를 개최하는데, 이날은 특별히 100주년을 기념해 더 요란하고 시끄럽고 화려했다. 2005년 이 무대에서 데뷔하여 LA필 음악감독이 된 구스타보 두다멜, 채드 스미스 LA필 회장과 대니얼 송 업무총책임자, 관할 카운티 수퍼바이저와 시의원 등이 참석하여 지나간 100년을 축하하고 또 다른 미래의 100년을 기약하는 흥분된 시간이었다.

올여름 할리웃 보울 시즌은 6월3일 오프닝 나잇으로 시작돼 9월29일까지 넉달 동안 매일 밤 멋진 콘서트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특히 7월26일엔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할리웃 보울에 데뷔하는 프로그램이 예정돼있다. 두다멜 지휘로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5번 ‘황제’와 교향곡 5번 ‘운명’을 감상할 수 있는 이 연주회는 한인 팬들에겐 ‘머스트 콘서트’가 될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여름밤은 할리웃 보울에서 영글어간다. 한번 다녀오려면 여러 가지가 번거롭기도 하지만, 일단 가서 앉으면 언제나 “아, 정말 좋다!” 소리가 절로 나오는 자연극장, 대도시의 바쁜 일상과 번잡을 훌훌 떨쳐버리고 상쾌한 공기와 바람, 밤하늘의 별과 구름, 그리고 수준 높은 음악을 동시에 만끽할 수 있는 최고의 문화공간이다.

할리웃 보울은 미주한국일보가 2003년부터 매년 열어온 ‘코리안 뮤직 페스티벌’ 때문에 우리에게 더욱 친숙하고 특별하다. 초창기엔 1만8,000석을 남가주 한인들이 가득 메우고 열광했으나 한류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미 전국에서 찾아오는 한인과 타인종들이 다함께 어우러져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흥겨운 잔치의 장이 되었다.

할리웃 보울은 모두의 공간이다. 다인종사회 LA의 미래를 내다본 ‘보울 레이디’ 아티 메이슨 카터의 혜안과 비전, 열정과 헌신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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