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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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말

2022-05-17 (화)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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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도 중요하지만 타고 나는 것들이 있다. 시인이 그렇다고 한다. 연습을 하면 시를 엮는 솜씨는 늘지만 없던 ‘시인의 눈’까지 생기지는 않는다. 말 잘하는 것도 어느 정도 선천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한다. 다행인 것은 말 잘 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말이 부족해서 오히려 신뢰를 얻는 경우도 있다. 성공한 세일즈맨 중에는 의외로 내향적이거나 말이 어눌한 사람이 적지 않다. 영어 잘 하는 2세는 낙선하는 반면, 한국서 대학까지 나온 1세 이민들이 선출직 공직에 당선되기도 한다. 말 이외의 어떤 것이 마음을 샀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 번 의회에서 하는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정치적 수사로 정교하게 준비된 메시지다. 감동적인 귀절이 많다. 저런 말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말의 힘과 함정이 동시에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지난 주 한국 대통령 취임식을 실황으로 봤다. 온갖 은원으로 얽힌 전직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은 모습은 묘한 감회를 불러 일으켰다. 한때 주인공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관객의 한 사람으로 물러 앉았다. 신임 대통령 내외의 인사는 유난히 깍듯해 보였다. 취임식 축가에 오페라 아리아가 포함된 것은 다소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취임사에서 재외동포에 대한 언급은 ‘750만 재외동포 여러분’, 한 마디였다. ‘혹시’ 했으나 ‘역시’에 해당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취임사는 의아했다. 듣고 나니 허전하기도 했다. 자유자유 외에는 크게 남는 게 없었다. 35번 언급됐다는 그 자유 속에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유가 담긴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같은 시대에 국민들이 특별히 자유에 목말라 하는 것도 아니고-. 다소 현학적인 담론을 엉뚱한 자리에서 들었다는 생각이었다.

새 정부의 비전이 나왔으면 하는 자리는 ‘국민이 주인인 나라’ ‘북한과 대화의 문은 열려 있다’ 등 지나치게 당연한 말들이 차지했다. 연설이 저러면 제목 달기가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얼핏 났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뒤에 ‘세계 시민 여러분’이 따라붙기도 했다. 굳이 그런 말이 없어도 대통령의 말은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공식적으로 발언하는 것이다. 이번 취임사에서 세계 시민에게 전해진 한국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외국 언론에 인용됐을 만한 내용이 있는지 궁금하다. 전자 정부 공식 누리집에 들어가 취임사를 찾아 다시 읽어 봤으나 이런 생각에 변화가 없다.

나만 그런가 했으나 뒤에 말이 많았다고 한다. 신임 대통령에 대한 예의상 그랬는지 노골적인 반응들은 자제된 느낌이다. 내부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밋밋해서 엉뚱하기조차 한 이 취임사는 누가 준비한 것인지 대통령 연설팀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대통령실에서 나오는 메시지가 계속 이런 식 이어서는 곤란하다.

‘국가가 여러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물어보라’.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사에 나오는 이 정도는 기대하지 않는다 해도 뭐 좀 기억될 만한 말을 담을 수는 없었을까. 매번 정치 메시지를 과하게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 전임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 이라는 말을 취임사에 남겼다. 이 말은 ‘말뿐’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퇴임 순간까지 회자됐다.

이런 표현이 결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밖에서 보는 한국의 신임 대통령은 풋내가 풀풀 난다. 꼭 나쁜 뜻이 아니다. 정치 신인인 그의 당선은 너무 노련해서 노회해진 기성 정치권에 대한 한국 유권자들의 반란이자 심판으로 보여 진다. 익숙한 것 보다는 서툴러도 신선함을 기대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게 전부라면 곤란하다. 이번 연설문은 대통령이 직접 많이 고쳤다고 한다. 취임사에 나타난 것이 그의 안목의 전부라면 불안하다. 아마추어 적인 식견에 고집과 추진력까지 더해진다면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를 대통령에 이끈 정치권은 구태의연한 세력이다. 아마추어리즘과 구태의연의 결합은 최악의 조합이 될 수 있다.

정권을 뺏긴 쪽은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원인과 과정이 어쨌든 이 정부는 한국민이 선택한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지 않는가. 운전을 하다 보면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할 때도 있으나, 오른쪽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 할 때도 있다. 곧장 간다고 바로 가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보면 이리저리 돌아간 것이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안 다리 후리기로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만이 정치가 아닐 것이다. 발목 잡기가 주특기가 되서는 곤란하다. 매우 싫어도 응할 것은 응하고, 도울 것은 도와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회가 멀리 돌아가지 않는다. 다음 기회도 갖게 된다.

해외에서 한국 대통령 취임을 지켜보면서 이런 소회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이번 취임사가 역사에 길이 남을 말 같지는 않다. 말이 전부가 아닐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논설위원>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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