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성의 권리, 태아의 권리

2022-05-13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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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숙명이다. 한 생명을 몸 안에 품고 사랑으로 키워 세상에 내보내는 역할은 여성만이 누릴 수 있는 숭고한 특권이다. 한편 다른 생명을 몸속에서 키운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과 책임이 따르는 행위이다. 그것이 종종 여성의 발목을 잡는 것이 사실이다. 남성들이 사회경제적 정치적으로 힘을 키울 때, 여성들은 아이 낳고 키우느라 집안에 묶였다. 그러기를 수천년, 세상은 남성지배 남성중심 남존여비의 문화로 통일되었다. 그 깊은 차별의 암반을 뚫고 평등의 고지에 도달해보고자 투쟁해온 것이 지난 세기 이후 여성의 역사이다.

미국에는 임신에 대한 재미있는 조크들이 있다. 임신과 출산으로 불이익을 당해온 여성들이 냉소적으로 만든 조크도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임신을 하게 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답은 “봉급 100% 받으며 출산휴가 2년, 입덧은 국가 1순위 건강문제”라는 것. 입덧으로 고생하는 게 만약 남성이었다면 지금쯤 그 단어 자체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 의학계가 기필코 해결방안을 찾아냈을 것이다.

2022년 5월 ‘임신’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정확히는 임신중단, 낙태가 미국사회를 거칠게 갈라놓고 있다. 1973년 연방대법원의 ‘로우 대 웨이드’ 판례 이후 미국에서 낙태는 “임신초기(첫 3개월) 허용, 중기(4~6개월) 제한적 허용, 말기(마지막 3개월) 금지”로 정리되었다.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을 시민의 사생활 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14조를 근거로 49년 전 연방대법은 여성의 낙태권을 지지했다. 여성이 자신의 몸에 대해 결정을 내릴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근년 변화가 일었다. 트럼프 집권 이후 공화당이 극우화하면서 공화당 주도 주정부들이 잇달아 낙태 제한/금지법을 제정했다. 주정부 재량으로 개입 가능한 임신중기 낙태 ‘제한’ 규정을 대폭 강화하는 추세이다. 일례가 임신부의 건강이 위협받지 않는 한 임신 15주 이후의 낙태를 전면금지한 미시시피 낙태제한법. 지난연말 연방대법이 이 법의 위헌여부를 심리하기로 결정하면서 낙태이슈는 수면 아래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초안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갑자기 이슈가 전면으로 부상했다.

7월초쯤 최종판결을 앞두고 새무얼 얼리토 대법관이 다수의견 1차 초안을 작성한 했는데 그 내용이 유출되었다. 일단 초안만 보면 연방대법은 ‘로우 대 웨이드’ 판례를 뒤집을 태세다. 트럼프 행정부시절 대법의 구성이 대폭 보수로 기울면서 진보진영이 불안해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표적 문화전쟁 중 하나인 낙태 이슈는 임신부와 태아 중 누구의 권리에 무게를 두느냐로 편이 갈린다. 자기 몸에 대한 여성의 결정권을 존중하는 민주 진보진영은 낙태 선택(Pro-Choice)의 권리를 지지한다. 반면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는 공화 보수진영은 태아의 생명권(Pro-Life)을 주장한다.

얼리토 대법관은 ‘로우’ 판례를 반대하는 근거로 헌법을 제시했다. 헌법이 낙태권리를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낙태권은 헌법으로 보호받을 수 없고, 각 주의 낙태 규제/금지법을 위헌이라 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그렇다면 헌법에는 왜 낙태권이 빠졌을까? 헌법도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각과 통찰력의 산물이다. 1776년 독립선언문 그리고 헌법을 작성한 건국의 아버지들의 관심은 ‘시민들’의 안녕이었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 되었”고, “생명과 자유와 행복추구의 천부적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찬란한 선언을 했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시민들’에 여성은 포함되지 않았다. 흑인노예, 원주민과 더불어 여성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로우’ 판결이 나온 70년대만 해도 여성은 온전한 존재로 대우받지 못했다. 혼자서 은행구좌를 열수 없고, 아버지나 남편의 서명 없이 신용카드를 발급받지 못했다. 임신하면 바로 해고되고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불법시술소나 집에서 낙태를 하다가 수많은 여성들이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목숨을 잃었다. 낙태권리가 20세기 여권운동의 큰 줄기 중 하나였던 배경이다.

신체 자기결정권과 관련, 여권운동진영이 농담처럼 하는 공상이 있다. 만약 정부가 모든 청년들에게 정관절제술을 강제한다면, 그리고는 아버지 될 준비가 되었음을 입증할 때 복원수술을 받게 한다면, 남성들은 어떻게 나올까. ‘내 몸’에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고 격렬하게 반대할 것이다. 왜 안 그러겠는가. 여성의 몸이라고 다르지 않다.

여성의 권리도 중요하고 태아의 권리도 중요하다. 모두가 존중받아야 한다. 임신과 함께 찾아오는 새 생명은 부부의 소망이고 가족들의 기쁨이다. 반면 뜻하지 않은 임신으로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우들이 있다. 임신으로 인한 사회적 경제적 타격이 너무 클 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이 위협받을 때, 인생이 끝장날 위기감에 내몰릴 때 … 여성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선택에 따른 도덕적 죄과도 여성이 감당할 몫이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는 존중되어야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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