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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 키우는 노조

2022-05-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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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 이후 미국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두드러진 현상들 가운데 하나는 노조운동의 활성화이다. 팬데믹이 본격화되던 시점부터 방역과 치료 일선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간호사들과 코로나 바이러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온 마켓과 요식업소 근로자들은 안전보호 대책 마련을 강력히 요구하며 조직화된 쟁의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노조가 있었다. 근로자들은 조직화된 행동을 통해 이전 같으면 해고가 두려워 꺼내기 힘들었을 요구들을 분명하게 밝혔다. 팬데믹을 통해 근로자들이 깨어나고 있으며 노조의 힘을 실감하고 있는 것 같다는 노동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이 같은 노조운동의 활성화가 비단 팬데믹의 영향 때문만은 아니다. 그 뒤에는 대학 교육을 받은 근로자들의 중심적인 역할이 자리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화이트칼라 계층에 진입하지 못한 많은 대졸들이 일선 근로자들을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면서 노조설립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노동자 의식화를 위해 위장취업을 했던 1970년대 한국의 대졸들과는 다르다. ‘번듯한’ 직장을 얻는 데 실패해 어쩔 수 없이 시간 당 임금을 받는 일자리로 밀려난 고학력자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그들의 노력이나 실력 부족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경제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대졸 일자리 전망은 2005년부터 나빠지기 시작했으며 2008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급속히 악화됐다는 것이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좋은 일자리가 보장됐던 이전 세대와는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이런 현실과 의식 사이의 괴리가 대졸 근로자들의 노조운동에 대한 적극적 참여로 표출되고 있다.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 55%였던 대졸들의 노조 지지율이 지금은 70%에 달한다. 그리고 젊은 사람일수록 지지율은 더욱 올라간다.

그런 가운데 아마존노동조합(ALU)은 지난 4월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의 한 아마존 창고에서 진행된 노조결성 투표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끌어냈다. 스타벅스의 경우 지난해 8월부터 노조결성 투표를 추진했던 미국 내 240여개 매장 중 50여 곳이 ‘노동자 연합’(Workers United)이란 노조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렇듯 본격화되고 있는 노조결성 움직임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대기업들이 아니다. 아마존은 거액을 들여 ‘반 노조 캠페인’을 벌였으며 투표율을 낮추기 위해 하루 20차례나 직원들을 회의에 소집하는 ‘꼼수’까지 동원했다. 그리고 지난 목요일에는 노조결성에 관여한 매니저급 직원 10여명을 해고했다. 아마존은 내부감사 결과와 구조개편에 따른 조치라고 주장했으나 이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스타벅스는 직원들 임금인상과 훈련 프로그램 확대를 발표하면서 비노조 매장 직원들에게만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두 기업뿐 아니라 애플 등 다른 대기업들도 ‘노조 해산’ 전문 로펌들을 고용해 직원들과 일대일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합법적으로 노조 결성을 방해하기 위한 작업을 벌이고 있다.

기업들의 거부감과 저지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조는 거스르기 힘든 시대적 추세가 되고 있다는 분석이 대체적이다. 고인플레로 명목임금의 실질 구매력이 너무 떨어진데다 고용시장 구조가 근로자 우위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노조는 사회개혁이나 정치운동보다는 임금과 근로조건 향상을 목표로 한 ‘실리적 조합주의’를 꾀한다.

따라서 정신없이 오르는 인플레이션은 앉아서 감봉 당하는 느낌을 지우기 힘든 근로자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노조의 필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기에 많이 배운 근로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노조의 확산을 한층 더 가속화시키고 있다. ‘노조 만들기’와 ‘노조 죽이기’로 나타나고 있는 노사 간의 치열한 힘겨루기 속에서 양측의 대승적 타협이 어느 때보다도 절실해 보이는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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