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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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하다

2022-05-11 (수)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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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을 뜻하는 이 단어는 영어로 존경(respect), 숭배(worship) 등으로 번역된다. ‘추앙하다’는 문장이 요 근래 SNS에서 심심찮게 보인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화제작으로 떠오르면서 주인공 염미정(김지원)의 “나를 추앙해요”라는 대사 또한 주목을 받은 것이다. 시청자들은 ‘썸’과 같은 가벼운 관계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열렬하게 타인을 추앙하고, 추앙받고 싶다는 주인공의 감정에 깊이 공감하고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극중에서 염미정은 지겹도록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20대 후반(또는 30대 초)의 계약직 신분 직장인이다. 그녀는 경기도 외곽에서 서울에 있는 회사로 출퇴근 하며 하루의 3시간은 대중교통에서 시간을 흘려 보낸다. 미정은 대출까지 받아 돈을 빌려줬던 전 남자친구가 잠적하는 바람에 신용불량자가 될 위기에 처한다. 우울하기만 한 자신의 삶을 누군가 구제해줬으면 하던 미정은 이웃집 알코올 중독자 구씨(손석구)에게 난데없이 추앙을 요구한다.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데.”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미정의 말에 따르면 추앙이란 무조건적인 사랑을 닮아있다. 묻고 따지지도 않고, 되돌려 받을 기대 조차 없이 주는 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온 마음 다해 응원하는 일.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도 겨우 존재할까 말까 한 그런 사랑이 미정이 원하는 추앙이다. 구씨는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라면을 끓여주고, 마중을 나가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여러 방식으로 미정을 추앙한다. 구씨의 추앙에는 큰 돈과 노력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의 투명한 진심 덕분에 미정은 조금씩 생의 활력을 되찾고 공허한 마음을 채워나간다.

추앙하는 일은 받는 이뿐만 아니라 주는 이에게도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구씨로 불리던 그는 한 여성을 추앙하면서 자신의 삶의 궤도를 되찾고, 깊숙이 묻어뒀던 과거를 현재로 꺼내왔다. 매일 술을 사던 편의점에서 술 대신 아이스크림과 커피를 사게 된 구씨의 사소한 변화는 사랑하면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어지는 사랑의 이상적인 형상을 구현한다.

조직 폭력배였던 구씨는 과거의 검은 그림자가 점차 본인을 옭아매자 미정에게 과거사를 고백하고, 미정으로부터 멀어지는 길을 택하려 한다. 그러나 미정은 더 큰 추앙을 건네며 구씨에게 다가간다. “이름이 뭐든, 세상 사람들이 다 욕하는 범죄자여도 외계인이어도 상관없다고 했잖아. 근데 그게 뭐. 난 아직도 당신이 괜찮아요. 그러니까 더 가요. 더 가봐요.”

구씨와 미정이 서로를 지지하고, 힘겨운 현실로부터 해방하는 모습은 시청자들에게도 큰 울림을 선사한다. 누구나 젊어서는 그런 사랑을 한 번쯤은 꿈꾼다. 조건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같은 절대적인 사랑을. 그런 사랑이 존재한다면 인생은 조금 더 살만한 곳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꿈을 품곤 한다. 그러다 나이가 들면 각박한 현실에 매몰돼 사랑은 사치라는 자조 섞인 비판을 하게 되는 쪽으로 꿈의 방향을 이탈한다.

하지만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는 사랑이 구원이 될 거라는 낭만적인 믿음을 다시금 붙잡고 싶게 만든다. 어쩌면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무엇이 아닐까?

박민규 작가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누구에게라도 사랑을 받는 인간과 못 받는 인간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사랑을 받는 한,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추앙을 받는 한 우리는 빛을 발할 수 있다. 세상의 주인공인 ‘계란 노른자’ 옆에서 마치 ‘계란 흰자’처럼 조연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건 모두 사랑이 결핍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 켜진 서로의 모습을 보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해야할 일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추앙하는 일뿐이다. 추앙하라.

<석인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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