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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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핵가족 이데올로기’

2022-05-0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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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통계 전문가인 피터 프랜시스는 2010년 센서스가 한창 실시되고 있을 때 이런 예견을 했다. “이번 센서스에서 미국 인구는 3억 명 넘게 집계될 것이다. 그런데 한 명이 실종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한 명은 바로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사회가 갈수록 변화하고 다양화되면서 이제는 ‘전형적’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미국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지적이었다. ‘전형적인 미국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전형적인 가족’ 또한 존재하기 힘들다.

‘전형적’이란 수식어는 ‘정상’이라는 강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아주 오랫동안 미국사회를 지배해왔다.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란 결혼 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남녀가 결혼을 해 아이를 낳고 이루는 가족만이 전형적이고 제대로 된 것이라는 고정관념은 아직까지도 뿌리 깊게 남아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가족이 다수의 자리에서 내려온 지는 이미 오래다. 2020년 센서스에 따르면 양쪽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이른바 ‘전형적인 가족’은 단 19%밖에 되지 않았다.


한쪽 부모만 있는 편부모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성동거, 그리고 동성결혼 가정 등도 수두룩하다. 여기에다 요즘은 자발적 의사에 따라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비혼 독신’도 하나의 선택으로 존중받고 있으니 이 또한 새로운 형태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미국인들의 가족형태는 날이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동성 간 결혼을 합법화하는 법원 판결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그 형태는 한층 더 다양해지고 있다. 이전에는 용인받기 힘들었던 새로운 모습의 가족들이 법적, 사회적으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10여 년 사이 미국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가족 형태의 변화는 여러 세대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다세대 가족’(multi-generational family)의 증가이다. 핵가족이 바람직한 규범이라는 생각이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일찍이 예견한 사람은 지난 2019년 사망한 USC의 사회학자 번 벵스턴이었다. 그는 “21세기가 되면 다세대 가족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20년 전 내다봤다. 그리고 그의 예견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퓨 리서치 센터가 센서스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21년 3월 현재 “한 지붕 아래서 다세대 가족으로 살고 있는” 미국인은 거의 6,000만 명에 달한다. 1971년과 비교할 때 거의 4배가 늘어난 수치이다.

이는 여러 세대가 한 가정에서 같이 살던 사람들의 비율이 지난 1940년 25%에서 지난 1980년에는 12%로 절반 이상 감소할 정도로 계속 감소해온 추세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퓨 리서치 보고서는 이런 현상을 “미국의 문화규범이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여러 세대가 함께 사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는 데는 경제적 사정과 어린 아이들 돌봄 같은 여러 현실적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핵가족의 와해를 “가족제도에 경종을 울려주는 위험신호”로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벵스턴은 이것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다세대 가족 간의 유대감은 핵가족의 그것보다 일생에 걸쳐 구성원들에게 한층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다세대 가족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평가는 부정적인 경우(17%)보다는 긍정적인 경우가 57%로 훨씬 더 많다.

가족은 가치관의 변화와 시대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맞춰 끊임없이 모습을 달리하면서 무수한 형태로 진화한다. 그러니 어느 한 가지 형태만을 ‘전형적’ 혹은 ‘정상적’이란 수식어로 규정할 수는 없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족의 형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도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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