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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그 도전과 환희

2022-05-04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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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지나 길은 슬픔의 도시로, 나를 지나 길은 영원한 비탄으로, 나를 지나 길은 버림받은 망자에 이른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문 입구에 적혀있는 유명한 시구다. 그 문을 통과해 지옥의 온갖 참상을 목격하고 연옥을 거쳐 천국에 이른 단테는 순수한 빛의 하늘인 최고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지성의 빛, 사랑으로 가득한 빛, 환희로 가득한 진정한 선의 사랑, 가장 감미로운 기쁨도 초월하는 환희의 빛”,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이고, 바로 사랑임을 깨닫는다.

단테의 신곡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읽지 않는 책’이라고 한다. 학교에서 배웠고 문학사에서 늘 언급되는 작품이며 지옥, 연옥, 천국편으로 되어있다는 사실도 다들 알고 있지만, 실제로 끝까지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3행의 연과 3박자 운율로 진행되는 1만4,233행의 장대한 서사시 ‘신곡’은 읽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한글번역판에서는 그 운율의 감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한층 진도가 안 나가는데,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 번역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라고 한다. 따라서 내용을 축약한 산문체 번역본들이 많이 나와 있는데 그런 축약본은 고전의 진수를 거의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권할만하지 않다.

‘신곡’ 읽기의 담대한 도전을 최근 완수했다. 3권의 책과 함께 이를 해설한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도 읽었다. 이런 ‘고행’을 감내한 이유는 한 편의 음악 대곡을 제대로 감상하고픈 욕심 때문이었다.

지난 28일 작곡가 토마스 아데스의 신작 ‘단테’(Dante)가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구스타보 두다멜 지휘의 LA 필하모닉 연주로 미국 초연됐다. 이 작품은 LA필과 영국 로열발레가 공동위촉한 것으로, 1부 ‘인페르노’(Inferno)가 LA필 100주년이던 2019년 5월 디즈니홀에서 초연된 바 있다. 이어 7월에는 뮤직센터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에서 발레무대로 공연되었다.

이후 연옥편(Purgatorio)과 천국편(Paradiso)까지 완성된 전 3부작이 2020년에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취소됐고, 2021년 10월 로열발레가 런던 코벤트가든에서 웨인 맥그리거의 안무로 전곡을 세계 초연했다. 마침 2021년은 단테의 700주기였다.

이날 LA필의 전곡 미국 초연은 발레 없이 음악만을 연주한 것이다. 보통 발레음악은 안무와 무용수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작곡되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연주로만 공연되는 일이 드물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나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수작만이 예외일 것이다. 하지만 아데스의 ‘단테’는 음악만으로도 힘차고 극적이고 신비로워서 총 90분의 연주가 시종일관 감관을 자극했다. 두다멜 지휘가 정말 대단했는데 신들린 듯 이끌어간 공연에 청중의 환호가 오랫동안 이어졌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편이 가장 많이 거론되고 인용되는 것처럼 음악도 ‘인페르노’가 가장 길고 인상적이다. 제9층까지 내려가는 지옥의 다양한 형벌과 사연들이 다채롭게 묘사되는데, 애욕의 벌을 받는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중세시대의 유명한 불륜 커플)의 음악은 처연하고 비탄스러운 한편 도둑들의 구렁에서는 로시니의 ‘도둑까치 서곡’을 차용한 음악이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지옥처럼 드라마틱하지 않은 연옥과 천국은 완전히 다른 장면들로 표현된다. 연옥에서는 녹음된 유대인들의 아침기도 선창에 새로운 음악을 입혀나가는 오케스트레이션이 이색적이었고, 천국에서는 음계가 계속 올라가면서 상향을 표현하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의 빛을 마주하는 부분에서는 천상의 합창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단테의 신곡은 음악, 미술, 영화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낳았다. 미술에서는 19세기 화가들인 윌리엄 블레이크와 구스타브 도레의 삽화들이 대표적이고, 영화에서는 연옥편을 소재로 한 1995년 히트 범죄스릴러 ‘세븐’과 2016년 지옥편을 그린 스릴러 ‘인페르노’(2016, 댄 브라운 원작)가 있다.


한세기 전 프란츠 리스트도 단테에 관한 피아노소나타와 심포니를 남겼다. ‘단테: 소나타풍의 환상곡’은 17세 소년 조성진이 2011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3위 입상)에서 연주한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있다. 반면 ‘단테 심포니’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음악회에서 연주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리스트의 친구였던 바그너가 “어떤 인간도 천국의 기쁨을 나타낼 수 없다”고 충고하자 1악장 지옥, 2악장 연옥에 이어 천국은 짧은 마니피캇(성모 마리아 송가)으로 마무리했다고 한다. 한데 토마스 아데스는 이 ‘단테 심포니’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작품 노트에서 밝히고 있다.

그래서 굳이 ‘신곡’을 다 읽고 들은 감상이 어땠냐고? 안 읽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환희가 있다. 또한 중세의 위대한 시인철학자이며 정치가로 망명생활을 했던 단테가 신화, 성경, 역사, 동시대인들의 죄와 공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들여다보는 재미도 있었다. 그러면서 단테라면 푸틴을 어디에 처넣을까, 상상해보았다.

림보, 색욕, 폭식, 탐욕, 분노, 이단, 폭력, 사기, 배신의 9층의 지옥에서 제7층에 폭력 지옥이 있다. 주로 고대의 독재자와 폭군들이 있는 곳으로, 알렉산더 대왕을 비롯한 역사 속 폭군들이 시뻘겋게 끓는 피의 강물에서 삶아지는 고통으로 목 놓아 울고 있다. 너무 끔찍한가? 그런데 단테의 지옥에는 이보다 훨씬 그로테스크한 형벌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독재자 한명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전쟁이 안타깝고 화가 나서 온갖 상상을 다해보는 것이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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