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딱 한잔”이라는 말처럼 자주 쓰이는 말도 없다. 직장동료들이나 친구들이 어울려 저녁식사를 하고 나면 누군가의 입에서 으레 나오는 말이 “딱 한잔만 더”이다. 어둠은 고즈넉하게 내려앉고 가벼운 취기로 기분은 한껏 고조되고 나면, 정다운 이들과 헤어지기가 섭섭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딱 한잔’이 2차로, 3차로 연결되곤 한다.
미국에서도 한인직장 동료들이나 친구들이 모이면 대개 비슷한 광경이 펼쳐진다. 술 몇잔 곁들여 식사한 후 1차로 끝나는 경우가 드물다. ‘딱 한잔’이 끼어든다. 음주운전 위험이 우려될 때는 술 대신 커피라도 한잔 나눠야 서운하지가 않다. 좀 더 오래 같이 어울리고 싶은 마음, 우리는 정이 많은 민족이다.
미국에서 ‘딱 한잔’의 문화는 좀 다르다. 대개의 경우 혼술이다. 퇴근 후 맥주나 와인 한잔 하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습관이다. 그렇게 한잔씩 마시는 술, 말하자면 적당한 음주가 건강에 좋다는 게 일반적 믿음이다.
연방질병 통제국(CDCP)도 한두 잔의 술을 굳이 금하지는 않는다. 2020-2025 CDCP 식사지침을 보면 알콜로 인한 건강위험을 줄이기 위해 합법적 음주연령의 성인은 금주를 하거나 하루 한두잔(남성 2잔 미만, 여성 한잔 미만)의 절주를 하라고 권하고 있다.
노년의 한 두잔이 완전 금주에 비해 오히려 심혈관 건강에 좋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지난 연말 유럽 예방심장학 저널에 게재된 관련 연구는 미국과 호주의 70세 이상 노년층 중 심혈관계질환 병력이나 치매 혹은 신체장애 없이 독립적으로 건강하게 생활하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했다. 이들을 평균 4년 7개월 관찰한 결과 술을 적게는 주 3.5잔, 많게는 주 7~10잔 마시는 사람들이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 심혈관계 질환 위험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주 3.5잔, 즉 이틀에 한잔 정도의 음주는 노년층 사망을 초래하는 모든 위험을 낮추는 효과가 있어 보인다고 연구진은 덧붙였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애주가들이 좋아할 내용이다. 그런데 문제는 음주와 건강 관련 전혀 다른 맥락의 연구결과가 있다는 사실이다. 심혈관계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한두잔의 술이 뇌 건강에는 100% 해롭다는 내용이다.
최근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발표된 관련 연구는 영국인 중년층 3만6,000여명을 대상으로 했다. 연구진이 이들의 알콜 소비량과 뇌 MRI 검사결과를 비교한 바에 따르면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뇌가 쪼그라드는 경향이 있다.
나이 들수록 뇌가 노화하면서 크기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런데 음주는 뇌 크기가 줄어드는 속도를 빠르게 함으로써 기억력, 판단력 등 뇌기능 감퇴 속도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50살 기준, 맥주나 와인을 매일 반잔 마시던 사람이 주량을 한잔으로 늘리면 뇌 크기는 2년의 노화에 버금가게 줄어든다. 음주량이 매일 한잔 반인 50살의 애주가는 뇌 크기로 볼 때 3살 반 더 늙어있다.
한마디로 하루 반잔도 해롭다는 것이다. 술을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과 비교, 하루 반잔만 마셔도 뇌는 반년 정도 더 노화한 만큼 크기가 줄어든다. 간 크게도 하루 4잔씩 폭음을 한다면 뇌는 10년 이상 팍 늙어버리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노년층이 가장 걱정하는 것이 치매다. 노년에 뇌 건강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심혈관계에 좋다고 하니 술을 계속 마실 것인가, 뇌를 생각해 끊을 것인가. 노년에 맞는 ‘딱 한잔’의 딜레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