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은 거대한 거품이고, 대단히 피상적인 비즈니스다. 그 버블을 나는 터트리고 싶다.”
“규칙이란 깨야하는 것, 그것이 내 존재이유다. 규칙은 깨고 전통을 지키는 것.”
“사람들이 내 컬렉션을 보고 아무 감정도 못 느낀다면 나는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다. 혐오감이든 기쁨이든 강렬한 감정을 느꼈으면 한다.”
‘패션계의 악동’으로 불렸던 전설적인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작품전(‘Lee Alexander McQueen: Mind, Mythos, Muse’)이 LA카운티뮤지엄(LACMA)에서 지난 24일 개막했다. 10월9일까지 계속되는 이 쇼는 맥퀸의 패션 70여점과 함께 각 작품의 영감과 관련된 회화, 조각, 사진, 프린트 등 라크마 소장예술품 100여점을 병렬 전시해 보여준다.
패션을 넘어 예술로 분류되는 맥퀸의 오뜨 꾸뛰르 컬렉션이 뮤지엄에 전시된 것은 그의 사망 다음해인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의 특별전(Alexander McQueen: Savage Beauty)이 처음이었다. 무려 100만 명이 넘게 몰려 최다관람 기록을 세운 이 전시는 파격과 돌풍 그 자체였던 천재디자이너가 19년 동안 창조한 작품들을 시즌별 주제별로 보여준 화제의 전시였다. 지금도 메트뮤지엄 사이트(blog.metmuseum.org/alexandermcqueen)에서 그 이미지와 영상들을 볼 수 있는데, 상상의 한계를 넘어선 디자인들이 넋을 잃게 만든다.
미 서부지역에서 처음인 이번 라크마 전시는 메트 전시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이 전시는 레지나 J. 드러커라는 컬렉터가 다수의 의상을 기증함으로써 북미에서 맥퀸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게 된 라크마가 마련한 기획전으로, 맥퀸의 진수를 보여주는 ‘위험한’ 패션보다는 ‘안전한’ 패션들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살짝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천과 재단과 디자인에서 모두 완벽했던 장인의 하이패션을 눈앞에서 보는 경이로움은 특별한 경험이다. 혁신적 디자인은 물론이고 독특한 옷감과 패턴들이 감탄을 자아낸다. 델리킷한 러프, 섬세한 드레스 앞섶, 목선을 두른 정교한 금박, 레이스와 자수와 장식들, 각 의상에 맞춘 구두와 머리에 쓰는 헤드레스까지 최고 수준의 미감을 향유할 수 있다.
영국 런던에서 택시기사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맥퀸은 세살 때 벽에 드레스를 그렸다고 한다. 학교에는 패션화보집을 들고 다녔고 수업시간에 옷만 그렸던 그는 친구들로부터 늘 계집애라는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다. 맥퀸은 중학교 졸업후 16세 때 런던의 새빌 로(Savile Row, 최고급 맞춤양복점 거리)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며 테일러링과 패턴 커팅을 배웠고, 여러 양복점과 디자이너를 거치면서 패션에 필요한 다양한 기술과 정보를 스폰지처럼 흡수했다.
21세 때는 이탈리아 밀라노로 건너가 당시 가장 유명했던 로메오 질리의 재단사로 일하면서 디자인에 대한 실무를 습득하기도 했지만 정식으로 디자인을 배운 것은 25세 때 런던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을 찾아간 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사실 패턴 강사를 지원했던 것인데 그의 포트폴리오에 깊은 인상을 받은 학교 측이 석사과정에 진학할 것을 권했고, 이 학교에서 맥퀸은 선생들보다 나은 실력을 보이며 천재 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쌓게 된다.
그의 졸업 작품은 빅토리아 시대의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에서 영감 받은 섬뜩하고 야만적인 디자인이었다. 이 쇼를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영국 보그 에디터 이사벨라 블로우가 보았고 컬렉션을 모조리 구입하면서 맥퀸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 졸업하자마자 ‘알렉산더 맥퀸’이라는 자신의 브랜드를 런칭했고,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컬렉션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앙팡테리블’ ‘패션계의 훌리건’이라는 경탄과 비난을 동시에 받기 시작했다.
27세 때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발탁되어 5년간 활동했으며, 2001년에는 구찌 그룹이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의 지분 50%를 인수하여 구찌의 파트너가 된다. 이후 재정적으로 안정을 얻고 창조력이 만개하면서 21세기 최고 디자이너의 명성을 얻게 된 그는 남성패션 브랜드 맥큐(McQ)와 향수 브랜드(My Queen)까지 런칭했으며, 다양한 기업들과의 디자인 협업은 물론 데이빗 보위, 레이디 가가, 비요크의 의상 및 앨범커버 작업을 맡기도 했다. 현재도 ‘알렉산더 맥퀸’ 브랜드는 런던, 파리, 뉴욕, 밀라노, 도쿄 등 세계 30여개 도시에 진출해있고 LA에는 로데오드라이브에 스토어가 있다.
맥퀸은 패션디자이너라기보다는 옷을 미디엄으로 사용한 예술가였다. 매번 명확한 이야기와 컨셉이 있는 쇼는 전위예술을 방불케 할 정도로 엽기적이고 파격적이었으며, 실험적이고 창조적이었다. 드라마틱한 연출로 유명했던 그의 런웨이에는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고, 불이 나기도 했으며, 로봇이 등장하기도 했다. 잔혹한 로맨티시즘, 영혼의 깊은 곳의 어둠과 공포를 끌어내 캣워크에 부려놓은 맥퀸 컬렉션은 그로테스크 하지만 황홀하게 충격적이다.
맥퀸은 40세이던 2010년, 어머니 장례식 하루 전날 런던 자택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천재 아티스트에 대한 세상의 끝없는 기대, 1년에 14개 컬렉션을 발표해야하는 살인적 스케줄, 가장 열렬한 조력자였고 친누이와도 같았던 이사벨라 블로우의 자살, 그리고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의 사망에 따른 우울증이 원인으로 추측된다. 화려한 거품 속에서 뼛속까지 외로웠던 맥퀸의 삶과 예술은 2018년 나온 다큐(‘Mcqueen’ 아마존 프라임)에 단편적으로 담겨있는데 그걸 보고나면 며칠이 고통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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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