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0년 몽고 침략을 받은 키예프 러시아는 350여년의 찬란한 문화가 파괴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후 이들은 흩어져 남하하면서 모스코 중심의 대러시아, 키에프 중심의 소러시아(우크라이나), 서쪽의 백러시아로 나뉘어져 각자의 공국을 세웠다. 그로부터 300여년을 올라가면 먼 조상이면서도 그들의 정복자인 머리에 뿔 달린 바이킹(노르만)을 만나게 된다.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이들은 가는 곳마다 교회, 수도원, 촌락 등을 불태우고 약탈해 그들이 지나간 곳은 중세 문명의 사지가 되었다.
200여명의 난폭한 몽고의 멍에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선 모스코 러시아에서 황제가 나타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황제가 군림하는 궁중에서는 음모가 계속 되어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가짜 황제까지 등장하는 일이 벌어져 이를 두고 계몽학자 볼테르는 ‘러시아 황제 제위는 선출제도, 계승제도 아닌 선점제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했다.
백성은 이전의 자유가 없는 농노가 되어 고된 일을 하면서 귀족들을 먹여살렸다. 그것도 평화시대 였을 뿐 나폴레옹과 나치 침략에 의한 생명 손실과 국토 황폐화는 슬라브족에 큰 변화를 주어 절망과 피해의식에 젖어들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것을 지키고 힘 생기면 남의 것을 약탈하는 폭력이 생활화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막스 레닌주의가 융합되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독재자 스탈린이 나타나서는 폭력을 과학화한 조직 테러를 해 자국민 4,000만 명을 ‘인민의 적’으로 살해했다. 인류 문명은 모두 러시아인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문명에도 테러를 가했다.
폭력 행위를 역사 법칙을 집행하는 진리라 말하는 독재자를 ‘조국의 아버지’ 아 부르며, 그의 장례식에서는 너무도 많은 애도의 인파가 몰려들어 500여명이 함께 깔려 죽은 기이한 사람들이다.
야자수 한그루 안자라는 지구 6분의 1 동토에서 보드카로 긴 겨울밤을 보내는 음침한 그들 러시아인들에게도 예술의 즐거움은 살아있다. 낭만적 음악가 차이코프스키, 시와 문학의 아버지 푸시킨, 귀족 신분이면서도 자신을 낮추어 살았던 소설가 톨스토이, ‘의학은 아내 문학은 정부’ 하던 체호프 등은 평화 시기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과학 분야에서도 뛰어난 발명품들이 많았으나 기술의 낙후와 자본 부족으로 실생활에서도 사용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역사 교재에 기록된 것이 별로 없다.
오랜 시기의 억압과 외침에 의해 파생된 그들의 폭력주의가 전쟁보다는 평화의 아름다움을, 폭력보다는 타협의 중요성을 중시하는 서구 문명에 근접함으로써 지구는 살기에 좀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다.
후세의 주인이 될 어린 학생들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 줄 훌륭한 역사 교사를 필요하는 하는 러시아인들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생각해 본다.
<
백만옥/전 고교 역사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