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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업보, 검찰의 업보

2022-04-19 (화)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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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 온다”고 하면 울던 아이들이 뚝 울음을 그치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 시대 칼 찬 순사는 그렇게 무서웠다는 것이다. 경찰을 ‘민중의 지팡이’라고 하던 때도 있었다. 경찰 스스로 자임했다. 신문 만평 등은 이런 경찰을 ‘민중의 몽둥이’라고 꼬집었다. 폭력 경찰이 사회문제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은 직접 겪었다.

‘칼 찬 순사’의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채 출범한 한국 경찰의 폭력도 만만찮았다. 일례로-, 캠퍼스에서 작은 소요 사태가 있었다. 시위가 있다고 학내의 모든 학생이 다 참여하는 것도 아니다. 교문을 나서는 데 갑자기 “잡아라-“ 하는 소리와 함께 한 떼의 사복들이 귀가 길 학생들을 덮친다.

머리에는 모두 흰 바가지를 쓰고 있다. 이른바 백골단. 학생으로 보이는 행인은 닥치는 대로 붙잡아 철망 버스에 처넣었다. “고개 숙여-“ 고함과 함께 무차별 폭행이 시작됐다. 버스 밖에는 시민들이 오가고 있었으나 닭장 차 안에서 벌어지는 한 낮의 폭력을 눈치 채는 이는 없었다.


무술 경찰, 기동대 소속이라고 들었다. 그렇게 짓이기는데도 용케 척추 등 사고가 날 만한 부분은 피해갔다. 폭력 기술자들이었다. 거리에서나, 파출소 안에서나, 노동 현장에서나 경찰은 패고, 시민은 맞던 시절이었다. 폭력 경찰은 고문 치사 사건도 일으켰다. 오죽 했으면 경찰을 몽둥이에 비유했겠는가.

미국 생활이 바빠 한국의 경찰까지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드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인터넷 시대에는 부러 찾지 않아도 한국 뉴스를 피해 가기가 오히려 어렵다. 우연히 경찰 소식을 접하게 되면 생경하고 의아하다. 어쩌다 이렇게 됐나. 한국 경찰은 그새 물이 돼 있었다.

욕하고, 대들고, 심지어 경찰에게 침까지 내뱉는다. 술까지 한잔 걸치면 출동한 경찰 보다 더 센 시민이 많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 열 몇 대가 부서졌다. 출동한 경찰차도 들이 받는다. 난동을 부리는 운전자는 마약에 취한 30대라고 한다. 쩔쩔매는 서울 경찰의 모습이 고스란히 CCTV에 잡혀 방영된다. 미국 경찰에 익숙한 사람들이 볼 때는 아슬아슬하다.

이건 아니다 싶다. 정당한 공권력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다면 누구를 믿을 것인가. 한국 경찰을 보면 문득 업보라는 말이 떠오른다. 한때 정도를 넘었던 경찰 폭력이 오늘의 추락을 자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업자득, 인과응보라는 말도 생각난다.

새 정부의 출범을 앞둔 한국 사회는 여전히 역동적이다. 특히 검찰의 기소권과 수사권 분리 문제로 요동치는 듯하다. 검수완박, 검찰 로부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겠다는 것인데, 반발이 거세다.

무엇보다 대안 부재라고 한다. 검찰 수사를 대체할 공권력이 없다는 것이다. 후속 법안들도 미처 준비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사는 모두 경찰에게 맡긴다? 한국사회의 그 정교하고 용의주도한 구조적인 악, 끊이지 않는 권력형 비리,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는 지능 범죄를 모두 맡길 정도로 경찰은 신뢰할 수 있는가. 경찰은 반발하고 있다지만 ‘경찰력의 질’에 대한 의구심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경찰이 검찰 보다 더한 거대 권력기관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 이 시기의 검수완박은 굽은 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것과 같다는 지적이 많다. 하지만 이런 무리는 검찰 스스로 자초한 것,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웬만했어 야지, ‘검찰 폭력’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경찰보다 지능적이고 정교했을 뿐이었다. 한국 검찰은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절대 권력이었다. 걸면 걸리고, 털면 털리는 한국 사회의 토양은 검찰을 키우는 자양분이 됐다. 한국 사회의 뜨거운 화두가 된 공정이 본격적으로 검찰력에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검찰의 선택적 정의는 유명하다. 눈에 빤히 보일 정도로 노골적이다. 검찰은 거대 이익집단이기도 하다. 조직에서 내쳐지지만 않는다면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철밥통 네트웍에는 변함이 없다. 영화에 나오는 검사는 대개 악덕 검사들이다. 부정적인 이미지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찰 스스로 검찰의 민 낯을 제대로 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서는 지금 편한 대로 미국 검찰을 갖다 대기도 한다. 미국 검찰은 단선화 된 조직이 아니다. 연방 다르고, 주 등 지방 정부가 다 다르다. 시 검찰은 검찰이라고 할 뿐, 한국식 검찰도 아니다. 형사만 다루는 기관이 아닌 것이다. 기소는 검찰이 독점하지 않는다. 검찰은 경찰의 수사결과에 대해 기소, 불기소, 기소를 위한 보완수사 요구 등 셋 중 하나만 할 수 있다. 카운티 검찰이 직접 수사를 할 수 있으나 예외적이다. 수사와 기소 업무는 당연히 분리돼 있다. 검사를 지낸 LA의 현직 판사가 전하는 미국 검찰이다.

검찰 권한의 결정은 그 땅에 사는 한국민들의 몫이다. 한 가지, 뭐든 과하면 반대쪽 역작용도 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생살이가 그렇고, 역사의 이치가 그렇다. 나의 세상살이에 지나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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