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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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강도, 미행강도,‘플래시 맙’도둑들

2022-04-15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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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는 각 매장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조직적 절도에 대처하느라 무진 애를 썼고 이제는 신물이 난다. 이에 홈 디포는 2022년 4월 1일 자정을 기해 미국 내 모든 매장을 드라이브 스루 체제로 전환하고 온라인 판매만 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전 온라인 매체를 통해 위의 내용을 읽고 내심 걱정을 했다. 페인트 색깔이든 타일 모양이든 직접 보고 골라야 마음에 들 텐데 고객들이 불편하겠다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4월 1일 만우절 조크였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내용을 덜컥 믿은 것은 매장 내 절도가 보통 심각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팬데믹 지난 2년 동안 떼강도/절도가 범죄의 새로운 추세처럼 부상했다. 수십명이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집결해 떼 지어 약탈하는 ‘플래시 맙(Flash Mob)’, 여러 명이 보석상이나 명품샵 진열창을 깨고 삽시간에 탈취하는(smash-and-grab) 강절도사건이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다.


아울러 늘어난 것은 부유층을 타깃으로 한 미행강도. 베벌리 힐스, 멜로즈 애비뉴 등지의 명품부틱이나 백화점, 고급식당이나 호텔 주변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비싼 자동차를 타거나 호화 시계/장신구를 착용한 사람들을 골라내 미행하다가 고가품들을 빼앗는 범행수법이다. 지난 12일 LA 경찰국(LAPD) ‘미행강도 태스크 포스’는 이들 사건이 주로 사우스 LA 소재 17개 갱단이 벌이는 범죄라고 발표했다. 이들은 여러 대의 차량과 무기, 다수의 인원을 투입해 조직적으로 감시-미행-강탈-암시장 판매를 계속해왔다고 한다.

지난 연말에는 한인부부가 이런 범죄피해를 입었다. 부부는 베벌리 힐스의 니만 마커스에서 샤핑을 하고 한인타운의 한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차에 타려는 순간 2인조 강도가 총을 들이대고는 수만 달러짜리 시계 등을 강탈한 후 대기하고 있던 차량을 타고 도주했다.

강절도 사건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어왔지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은 예사롭지 않다. 불특정 다수가 한꺼번에 모여 백화점이나 명품점을 터는 플래시 맙이나 대낮에 거리낌 없이 진열대를 부수고 물건들을 들고 나오는 도둑질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어떤 범죄든 범법자는 들키지 않고 잡히지 않으려고 애쓰기 마련인데 근년 도둑들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탈취한다. 잡으려면 잡아보라는 식이다.

떼강도 사건이 특히 극성을 부린 것은 지난해 블랙 프라이데이 즈음이었다. 영화에나 나올법한 사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11월 19일 북가주 베이 지역에서는 저녁 8시부터 4시간 동안 루이비통, 버버리, 블루밍데일, 입생로랑 등 명품점에 도둑들이 떼로 몰려들었다. 그 다음날 밤에는 인근 노스트롬에 무려 80여명이 들이닥쳐 백화점을 싹쓸이 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는 LA 그로브몰 내 노스트롬에 떼강도가 쇠망치를 들고 들이닥쳤고, 블랙 프라이데이인 26일에는 로데오 드라이브, 멜로즈 플레이스 등지의 고급상가들이 줄줄이 떼강도 피해를 입었다.

도둑질을 하면서 이들은 왜 이렇게 뻔뻔한 걸까. 범죄를 저지르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이 없다면 그 개인, 그 사회에는 문제가 있다. 집단 강절도 행각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소셜네트웍이다. 범행을 주도하는 조직이 모일 모시 어디로 모이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사방에서 모여든다. 그렇게 모여서 하는 것이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플래시 맙이 아니라 도둑질이고 약탈인데도 근 100명이 희희낙락 모여든다면 이는 사회 병리현상이다.

절도사건 증가와 관련해 우선 눈총을 받는 것은 프로포지션 47이다. 2014년 통과된 프로포지션 47은 개인적 사용 목적의 마약 소지나 소액 절도(950달러 미만)를 중범이 아닌 경범죄로 다루도록 하고 있다. 배가 고파서, 잠깐의 실수로, 자잘한 물건을 훔친 경우 징역형은 너무 과하다는 판단이다. 교도소 수감에 드는 천문학적 비용을 정신건강, 마약치료 등의 프로그램에 투입해 선도하자는 취지이다.


그런데 이 법의 허점이 종종 바늘도둑을 소도둑으로 만들고 있다. 아무리 여러 매장을 돌며 도둑질을 해도 한 곳에서 훔친 물건 값이 950달러 미만이면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보란 듯이 들어가 물건들을 들고 나오고, 업주는 신고도 하지 않는 배경이다.

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팬데믹 이후 심화한 경제적 양극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 불평등 보고서에 따르면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 99%의 소득은 줄었지만 세계 10대 부자의 부는 두 배로 늘었다. LA는 특히 극한 부유층과 극한 빈곤층이 공존하는 도시이다. 부자들은 지난 2년 호황을 맞은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 덕분에 재산이 펑펑 늘었고, 빈곤층은 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물가까지 뛰면서 끼니를 거를 판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어느 절도범은 “이렇게 해서 렌트비 내고 자동차 상환금 낸다”고 했다.

빈곤과 불평등이 절망을 키우고 있다. 희망 없는 나날이 양심을 마비시키고 있다. 플래시 맙, 뻔뻔한 절도, 떼강도는 이들의 비뚤어진 아우성. 정부의 정책적 개입이 시급하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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