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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고의 아름다운 모험

2022-04-13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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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팬데믹이 막 시작됐을 무렵, 바이올리니스트 제니퍼 고가 페이스북에 올린 영상을 보게 되었다. 졸지에 연주무대와 수입을 잃게 된 프리랜서 음악인들을 위해 그녀가 시작한 ‘홀로 다함께’(Alone Together) 프로젝트였다.

제니는 팬데믹이 시작되자마자 생계에 타격을 받지 않는 중견 작곡가 20명에게 전화해 짧은 솔로바이올린 곡을 하나씩 ‘기증’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와 함께 그들이 멘토링하는 신인 작곡가 한명씩을 선정해 이들에게는 신곡을 ‘유료’ 위촉해달라고 했다. 위촉비용은 ‘아르코 콜래보레이티브’(ARCO Collaborative)를 통해 지급할 터였다. 이 단체는 제니 자신이 여성과 유색인 음악인들을 위해 2014년 창설한 비영리단체다.

그렇게 모아진 40곡을 그녀는 2020년 4월초부터 10주 동안 매주 토요일 4곡씩 초연하여 온라인에 올렸다. 맨해튼의 아파트 거실에서 자신의 전화로 촬영한 영상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연주자였으므로 매주 챙겨듣지는 못했어도 유튜브에 올라올 때마다 찾아서 들었다. 모두 4분 이내의 짧은 곡들이었고, 함께 고난을 통과하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감정과 목소리가 담긴 작품들이었다. 날카로운 고통이 느껴지는 곡, 절규하는 곡, 고립의 신음이 새겨진 곡, 그럼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음악들이 이어졌다.


팬데믹 속 음악인들의 다양한 경험을 창조적으로 분출시킨 이 프로젝트는 시작은 소박했으나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류언론이 ‘위기 시대의 경이’라고 찬사를 보냈고, 미국의회도서관은 ‘차세대 모델’로 선정하여 ‘얼론 투게더’의 모든 자료를 아카이브에 보관하기에 이르렀다. 미래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 악보와 연주 영상은 물론이고, 작곡가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인터뷰 영상까지 모두 저장된 것이다.

사안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 된 제니는 이를 정식으로 녹음해 작년 8월 앨범으로 출반했다. 그리고 이 음반으로 그녀는 이달 초 열린 제6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클래식 독주악기 부문상을 수상했다. 바로 지난해 리처드 용재 오닐이 수상한 바로 그 부문이다. 두해 연이어 코리안 아메리칸 연주자들이 각각 남녀 최초로 굴지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들은 수상도 못한 BTS가 그래미 무대에서 공연했다는 뉴스만을 요란하게 보도했지, 한인 2세 연주자가 클래식 음악계에서 이처럼 큰 상을 수상한 소식에 대해서는 거의 보도하지 않는 인색함(또는 무식함)을 드러냈다.

그런데 제니퍼 고에 대한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현대 클래식음악계에서 가장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의 하나로 꼽히는 그녀는 내일(14일 오후 8시) UCLA 로이스홀에서 ‘모두 일어서 연대하자’(Everything That Rises Must Converge)라는 아주 특별한 공연을 초연한다. 흑인 성악가 다본 타인스(Dav?ne Tines)와 함께 하는 이 공연은 미국의 인종차별 이슈를 정면에서 도전하는 최초의 유일무이한 퍼포먼스다. 바이올린과 노래, 녹음인터뷰와 영상이 함께하는 멀티미디어 공연으로, 두 유색인 음악가는 한국의 자장가, 바흐와 베토벤, 빌리 할러데이의 ‘이상한 열매’ 등을 연주하며 개인의 가족사를 통해 마이노리티 미국인들이 겪어온 차별을 고발한다.

제니는 한국전쟁 피난민이었던 어머니(거트루드 순자 리 고)가 미국으로 이민 와 교수가 되기까지 겪은 이야기를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준다. 타인스는 할머니의 회상을 통해 고통스런 흑인차별과 폭력의 역사를 증언한다. 난민과 노예의 후손들인 두 사람이 백인 일색인 클래식 음악계에서 정상에 서기까지의 정체성을 탐구하고 조명하는 작업이다. 아울러 미래의 유색인 아티스트들을 위해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클래식 음악무대에서 처음으로 코리안 아메리칸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공연입니다. 한국인들은 벌써 꽤 오랫동안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을 거두었지요. 하지만 우리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서양음악을 공연하며 그들의 이야기만을 연주해왔을 뿐이죠. 코리안 아메리칸의 경험과 이민사, 아시안이란 이유로 살해당하고 지하철에서 떠밀리거나 폭행당하며 우리가 겪고 있는 일들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한 적이 한번도 없어요. 다본 타인스의 흑인 역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수세대에 걸쳐 부당한 린치와 폭력을 겪어왔지만 이런 이야기를 표현할 클래식 음악무대는 없었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부모 세대의 유산을 갖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이런 경험들은 모두 유니버설 한 것입니다.”

지난주 전화 인터뷰에서 제니퍼 고는 이 프로젝트에 UCLA와 UCSB 등 대학들과 흑인 커뮤니티가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고 있고, 주류언론인 뉴욕타임스도 특집으로 크게 보도했지만(4월 10일자)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처음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무대에서 나처럼 생긴 청중을 많이 보고 싶다”고 호소했다.

제니와 다본이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동안 팬데믹이 시작됐고, BLM(흑인목숨도 소중하다) 과 아시안 증오범죄가 급부상했다. 그리고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가 모두 피해자였던 4.29 폭동 30주년이 다가온다. 어느 때보다 시의적절한 이 공연은 기라성 같은 현대작곡가들의 신곡을 100곡 넘게 초연한 그녀에게도 또 다른 모험이고 도전이다. 그 여정에 많은 한인들이 동참하고 연대하는 것, 그것이 가장 큰 힘이 된다고 제니는 말했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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