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15일 해방 당시 조선에는 80여만 명의 일본인들이 경성(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서 그들의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재조(在朝)일본인들의 안전한 귀국을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8월15일 여운형에게 조선의 치안권과 행정권을 이양했다. 이에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발족시키고 8월 말까지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설립했다.
육지와의 연락이 지연되어 육지의 사정을 잘 몰랐던 전라남도 제주군에서는 9월 10일 제주도(濟州島) 건준이 뒤늦게 결성되었다가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다. 9월 28일 미군이 제주도에 진주하였으나 실질적인 군정업무를 담당할 부대가 도착한 것은 11월 9일이었다.
제주도의 실정에 어두웠던 미군정 부대는 이미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인민위원회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육지에서는 미군정에 의해 승인이 거부된 좌경세력의 인민위원회가 제주도에서는 그 세력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1946년 8월 1일 제주도(島)가 군(郡)에서 도(道)로 승격되면서 우익세력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이에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제주도의 좌익진영은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제주민전)을 결성하고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 날 ‘3.1투쟁기념행사’를 개최했다. 제주읍에 운집한 3만 명의 주민은 3.1절 기념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제주읍내 관덕정 부근에서 어린 아이가 시위를 진압하던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다쳤다. 기마경찰이 다친 아이를 그냥 두고 가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면 항의했다. 이에 무장경찰들이 총격을 가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충돌로 민간인 6명이 사망했다. 3월 8일 미군정청은 사건 조사를 위해 합동조사반을 제주도에 파견했으나 사태수습보다는 시위 주동자를 잡는 일에 주력하였다.
이에 좌익진영은 3월 10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 관 총파업에 들어갔다. 3월 19일 조병옥은 이 총파업은 북한과 공모해서 발생했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제주도를 ‘빨갱이 섬(Red Island)’으로 몰아갔다. 미군정 역시 “제주도는 70%가 좌익이다.”고 하며 제주도를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했다. 미군정과 좌익세력의 갈등은 점점 극으로 치달아가면서 상호 폭력이 난무했다.
1948년 1월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분명해지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5.10 단독선거 저지를 명분으로 경찰서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하여 350여 명의 무장대가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하고 우익단체와 요인들을 습격했다.
그 후, 군대가 출동하여 진압이 시작되고 김달삼을 주축으로 한 무장대가 저항하여 제주도는 극도의 혼란한 상태가 되었다.
11월 13일부터 군경토벌대는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생하기 시작했다. 이 날 토벌대는 애월면 하가리에서 가옥에 방화하고 남녀노소 25명을 집단 총살한 뒤, 소길리 원동마을에서도 주민 50~60명을 집단 총살했다. 이 날을 기점으로 약 4개월간 중산간 마을은 초토화되고 주민들을 집단 총살당했다.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1만4,532명이 희생됐다.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1948년 11월 13일부터 시작된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다.
이상이 이른바 ‘제주4.3’ 사건의 전말이다. 제주도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추모하고 한국의 현대사를 올바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남로당이 준동한 4월 3일이 아니라 군경토벌대에 의해 집단 살생이 시작된 11월 13일을 기억해야 한다.
<
주동환/코리안리서치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