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는 로마를 대표하는 폭군 중 한 명이다. 그는 자기를 보위에 앉힌 친모와 아내를 죽이고 학정을 일삼다 권좌에서 축출된 후 30살의 나이에 자살했다.
그가 죽인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기원 54년 그가 즉위했을 때 로마의 공식 은화였던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은 90%였다. 그러던 것이 14년 뒤 그가 쫓겨날 때는 12%가 줄었고 로마 말기인 270년 경에는 아예 사라졌다. 이름은 은화지만 은이 없는 화폐의 등장은 나라가 망조에 들었음을 말해준다. 아닌게 아니라 그 후 얼마 있다 로마는 망했다.
은화의 은 함량이 줄어든 이유는 간단하다. 돈은 더 쓰고 싶은데 은이 부족하니까 조금씩 빼돌린 것이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사용하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이 사실을 알게 되며 화폐의 가치는 하락한다. 화폐 가치의 하락이 곧 인플레다. 레닌 말대로 사회의 기본 질서를 뒤엎는데는 인플레만한 것이 없다. 사람들은 성실하게 일해 재화를 생산하기보다는 돈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흥청망청 쓰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사회가 발전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집권자들은 화폐를 남발하는 일을 거듭해왔다. 그러지 않고 살림을 꾸리자면 지출을 줄이거나 세금을 더 걷는 수밖에 없는데 둘 다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이다. 송나라를 무력으로 정복한 몽골의 원은 송이 발명한 지폐의 매력에 빠져 이를 남발하다 인플레로 사회가 어지러워지면서 망했다.
돈과 국부의 관계를 오인해 흥청거리다 몰락하기도 한다. 16세기 신대륙을 정복한 스페인은 막대한 금은 보화를 수탈해 금화, 은화로 만들어 뿌렸으나 재화의 생산이 뒤받침되지 않은 화폐의 급증은 인플레를 불러왔고 이 또한 스페인 쇠락의 단초가 됐다.
20세기 들어와서도 같은 일은 반복됐다. 제1차 대전에서 진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물고 국가를 운영할 돈이 없자 마르크화를 마구 찍어냈다. 그 결과 1922년에서 1923년 1년 사이 빵값은 10억배가 올랐다. 이것이 나치 득세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물가는 물건과 돈과의 비율이다. 물가가 오르기 위해서는 물건의 수량이 줄거나 돈의 양이 늘어나야 한다. 모든 물건의 평균적 상승을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특정 물건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인플레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다른 물건의 가격은 상대적으로 내려가기 때문이다. 모든 물건의 수량이 동시에 줄어야 되는데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 따라서 인플레가 발생했다면 이는 돈의 양이 늘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인플레는 언제나 항상 통화적 현상”이란 말이 나온 것은 그 때문이다.
인플레가 통화적 현상이라면 해법 또한 간단하다. 통화량을 줄이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채 매입을 통해 현금을 풀던 일을 중단하고 오히려 국채를 팔아 현금을 회수하는 방법과 금리를 올리는 방법이 있다. 금리가 인플레보다 높아지면 사람들은 돈을 쓰는 대신 붙잡아 두려는 경향이 생긴다.
70년대 미국은 고 인플레로 신음했다. 연방 정부가 월남전과 사회 복지 비용을 국채 발행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이다. 1980년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는 연방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려 인플레를 잡는데 성공했으나 80년과 82년 심한 불황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정부가 코로나 구제 명목으로 돈을 마구 풀면서 미국 경제가 40년래 최악의 인플레를 경험하자 FRB가 국채 매입 중단과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와 함께 주목을 끄는 현상이 발생했다.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를 넘어서는 소위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이 그것이다.
장기 금리는 통상 단기 금리보다 높은 것이 정상이다. 먼 미래일수록 불확실성은 더 커지며 사람들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기적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이에 대한 프리미엄을 요구하며 이는 장단기 금리 역전으로 나타난다.
문제는 이것이 불황의 전조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1980년 불황과 1990년 불황, 2000년대 초 하이텍 버블과 2000년대 중반 부동산 버블이 터지면서 찾아온 불황, 그리고 2020년 불황 전 어김없이 금리 역전 현상이 일어났다. 2020년 불황은 코로나로 인한 경제 봉쇄와 함께 왔다는 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금리 역전과 불황이 높은 상관 관계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주말 2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2.44%로 10년 만기 국채의 2.38%를 넘어섰다.
단기 금리가 장기 금리를 넘었지만 전문가들은 이것만으로 불황을 예상하기는 이르다고 말한다. 인플레를 잡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인플레는 고통없이 잡혀지지 않는다. 과연 FRB가 불황을 피하면서 인플레를 해결하는 두 토끼를 잡을 수 있을 지 모두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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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