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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이퍼 빈야드’, 나파 밸리

2022-03-30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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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신세계그룹이 ‘셰이퍼 빈야드’(Shafer Vineyards)를 2억5,000만달러에 인수했다는 뉴스가 와인업계의 화제다. 전에 이 와이너리를 방문했었고, 그때 사온 와인을 아직도 몇 병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소식은 개인적으로도 비상한 흥미를 갖게 한다.

‘셰이퍼’는 나파밸리에서 가장 맛있는 카버네 소비뇽이 나오는 스택스 립(Stags Leap) 지역의 터줏대감이다. 소수 가족 팀의 경영만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은 로버트 파커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와이너리의 하나”라고 평했고, 수많은 와인잡지에서 최우수와인 혹은 와이너리로 선정된 바 있다. 대표 와인 ‘힐사이드 셀렉트’(Hillside Select, 325달러)는 이름 그대로 부드럽게 경사진 언덕에서 자란 100% 카버네 소비뇽 포도로 만든, 나파에서도 최상품 대열에 오르는 와인이다.

2016년 ‘셰이퍼’를 방문했을 때 받은 첫인상은 ‘알짜’ 와이너리란 것이었다.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건축물, 인테리어, 정원이 꾸밈없이 소박했다. 고품격 와이너리들을 가보면 하나같이 멋지고 독특한 건물, 화려하고 세련된 테이스팅 룸을 자랑하는데 ‘셰이퍼’는 거의 심심할 정도로 장식과 스타일이 배제돼있었다. 마치 “우린 와인 잘 만드는 거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라는 듯한 분위기였는데 그것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이 와이너리는 시카고에서 출판사를 경영하던 존 셰이퍼가 1973년 나파 밸리로 이주해 일군 곳이다. 그때만 해도 스택스 립 지역은 아무도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미개척지였는데 그는 지중해성 토양과 기후를 가진 이곳을 눈여겨보고 209에이커를 사들였다. 그리고 직접 트랙터를 몰며 포도나무를 경작하고 와인을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첫 빈티지(1978 Cab)부터 국제적으로 우수성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10년 후엔 UC데이비스에서 와인양조와 포도재배를 공부한 아들 더그가 와인메이커로 합류했고, 다음해 고용된 보조와인메이커 일라이아스 페르난데즈와 함께 세 사람이 이후 30여년간 기막힌 호흡을 맞추며 ‘셰이퍼’를 최고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창업주는 오래전 은퇴하고 얼마전 타계했으며 현재 셰이퍼는 더그와 일라이아스가 운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신세계의 인수 후에도 한동안 남아 양조를 책임지게 된다고 한다. 더그 셰이퍼는 최근 고객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오랜 숙고 끝에 우리 가족은 신세계라는 멋진 팀에게 셰이퍼를 팔았다. 우리 빈야드와 와이너리가 새로운 챕터를 맞게 되어 흥분되며, 특히 새로운 팀은 ‘퀄리티’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많은 신뢰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대기업이 나파 밸리의 명품 와이너리를 인수한 배경에 관해 한국 언론과 와인업계는 많은 추측과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그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 거래는 와인애호가인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주도로 성사됐으며, 표면상의 이유는 해마다 오르는 나파 밸리의 부동산에 대한 투자다. 하지만 와인수입(신세계 L&B)과 유통망(이마트)을 소유한 거대기업으로서 직접 생산에 뛰어들어 와인시장에서 고급화와 차별화를 노리는 포석이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거기에다 ‘와이너리 소유주’라는 신분과 위상이 큰 매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세상에 돈 많은 재벌은 많고도 많지만 와이너리를 가졌다고 하면 완전히 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세계의 ‘셰이퍼’ 인수를 이희상 전 동아원 회장이 세운 ‘다나 에스테이트’와 비교하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두 와이너리는 태생적으로 다르고, 위상과 목표도 다르다. 와인에 대한 장인정신 하나로 ‘맨땅에 헤딩’하여 정상에 오른 ‘다나’는 철저하게 나파 지역사회에 동화된 컬트와인이다. 50년 역사의 명성을 가진 와이너리를 난짝 사들인 것과는 비교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가지 거슬리는 것은 한국 언론들이 ‘셰이퍼’를 컬트와인이라고 한껏 띄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컬트와인이란 추종자는 많은데 생산량이 적어서 희소성과 투자가치가 있는 와인, 회원들에게만 소량 판매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못 사고 나중에는 부르는게 값인 와인, 나파 최고의 토양에서 자란 최상품 카버네 소비뇽으로 연간 수백케이스만 생산하는 평균 500~800달러이상의 부티끄 와인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카버네 뿐 아니라 샤도네, 시라, 디저트와인까지 6종을 연간 3만6,000케이스 생산하는 ‘셰이퍼’는 컬트와인이 아니라 그저 프리미엄 와이너리라 해야 할 것이다.

세계적인 와인산지 나파 밸리에 이제 한국인이 운영하는 명품 와이너리가 두 개로 늘었다. 서양문화에서 와이너리 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꿈의 실현이고, 최고의 미감을 나누려는 궁극적인 열망의 성취다. 그런 와이너리들이 지역사회에서 펀드레이징과 봉사에 앞장서며 존경받는 풍토를 형성해왔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식 기업문화를 가진 신세계가 ‘셰이퍼’의 품질과 명성을 어떻게 이어갈지 기대와 우려가 겹쳐진다. 부디 한창 기세 좋은 ‘문화강국’ 한국의 이미지를 견인하면서 나파 밸리라는 까다롭고 배타적인 와인마을에서 좋은 이웃, 모범 양조주가 되어주기를 바란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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