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1543년 5월 24일 70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는 방금 출간된 그의 책이 들려 있었다 한다. 그때까지 유럽인의 상식이자 교회의 공식 입장이었던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돈다’는 천동설 대신 ‘지구가 태양의 주변을 돈다’라는 지동설을 제시한 ‘천체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다.
단순히 천체 물리학자가 아니라 교회법 박사이자 외교관이었던 그는 이 책의 파장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동설을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로 내세우고 출판 일자도 자기 임종에 맞췄다고 한다. 훗날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공개적으로 옹호하는 책을 냈다 종교 재판에 넘겨져 겨우 목숨을 부지한 것을 보면 그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어쨌든 이 책은 우주에 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놓고 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킨 근대 과학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란 말이 사람들 사이에 괜히 널리 퍼진 게 아니다.
이런 업적을 남긴 사람이 당시 유럽의 변방 폴란드 사람이란 점이 이채롭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는 ‘폴란드 르네상스’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과 예술이 번성하고 정치 경제적으로도 번창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지켜낸 폴란드는 1264년 ‘유대인 자유에 관한 대헌장’으로 불리는 ‘칼리스 칙령’을 반포해 어느 나라보다 유대인의 권리를 보호했고 재능과 돈을 가진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융성하기 시작했다. 훗날 히틀러에 의해 희생된 600만의 유대인 중 절반이 폴란드 출신이고 아우슈비츠나 트레블링카 같은 집단 학살 수용소가 폴란드에 차려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폴란드는 16세기 리투아니아와 합병하면서 한 때는 영토가 한반도의 5배에 달하는 유럽 최대국가가 된다. 1609년에는 러시아를 침공해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러시아 황제 바실리 4세를 바르샤바로 압송해 살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위세를 떨치던 폴란드도 내전과 개혁 실패로 1772년에는 프러시아와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해 나라가 세 조각 나는 치욕을 당한다. 1791년에는 유럽 처음으로 미국을 본 딴 근대적 헌법을 채택하며 광복을 꿈꾸지만 1793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2차 분할 당하며 1795년 타데우스 코슈스코가 주도한 봉기가 실패로 끝나면서 최종 3차 분할과 함께 독립국으로의 지위를 상실한다. 폴란드 국민들은 그 후 123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겪어야 했다.
애절한 슬픔의 작곡가 쇼팽이나 방사능을 연구해 여성 처음으로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가 폴란드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것 모두 이와 유관함은 물론이다. 폴란드인들은 수도 바르샤바 공항을 ‘쇼팽’ 공항으로 부르며 그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고 있다.
폴란드인들은 1830년, 1848년, 1863년 세차례나 봉기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제1차 대전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독립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래 가지 않는다. 나치 독일과 스탈린의 소련이 폴란드 분할에 합의하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전후 다시 독립을 찾기는 했으나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한 동안 잠잠했던 폴란드는 1978년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가 400년만에 처음 비 이탈리아인으로 교황에 선출되고 1980년 레흐 바웬사가 그단스크에서 ‘연대’라는 자유 노조 운동을 일으키며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이것이 공산주의 몰락의 신호탄이라고 짐작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일기 시작한 자유의 물결은 급기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고 소련 해체의 원동력이 된다.
그 폴란드에 요즘 다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핵심 병참 기지로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미 폴란드에 5,000명의 병력을 증파했으며 패트리엇 지대공 미사일 포대를 설치했다. 폴란드는 45명의 러시아 외교관을 스파이 혐의로 추방하고 다른 모든 나라를 합친 것보다 많은 200만 우크라이나 난민을 수용하는 등 러시아와 결전 태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을 비롯 서방 진영이 우크라이나에 보내고 있는 군수품 대부분이 폴란드를 통해 흘러들어간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한 달 간 바이든을 비롯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부장,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 등이 줄줄이 폴란드를 방문한 것만 봐도 미국이 이곳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알 수 있다. 지난 주말 폴란드를 방문한 바이든 대통령은 “나토의 영토는 단 1인치도 내주지 않을 것”이라며 “푸틴은 더 이상 권좌에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폴란드가 흔들릴 경우 우크라이나의 침몰은 물론이고 동유럽 전체가 러시아의 영향권안에 들어간다. 제2차 대전의 발발지이자 동유럽 공산주의 몰락과 소련 해체의 시발지인 폴란드가 이번에 역사적 소임을 다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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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