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2022-03-26 (토)
최동선 수필가
넷플렉스에서 영화를 보는데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TV를 끄고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 놓았다. 바람에 몸을 맡긴 빈 숲이 몸살을 앓듯 신음 소리를 내고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짐작했다. 지아비를 떠나 보낸 젊은 여인의 울음처럼 바람은 밤새 끓어질듯 이어졌고 다시 폭풍처럼 몰아쳤다.
아침에 창 밖을 보니 밤 사이 비바람은 하얀 눈꽃으로 변해 있었다. 주중에는 60도를 오르내려서 이렇게 봄이 오나 싶었는데 여지없이 눈폭풍이 몰려와 봄에 대한 기대감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다. 사실 이런 당혹감은 해마다 반복되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기억해냈지만 늘 그렇듯 포기할 즈음에야 나타나는 것이 기다림의 실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눈 폭풍이 지나간 하늘은 거짓말 처럼 맑고 청명했다. 빈 숲이 다시 숲으로 이어져 산에 다다랐고 빈 숲사이로 보이던 작은 집들은 눈 속에 묻혀 다시 산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한낮이 되자 기온은 다시 가파르게 올라갔고 봄 눈은 주차장 모퉁이에 흔적만 남게 되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눈이 왔던 기억만 남았을 뿐이다. 3월에 마주한 눈은 마치 잊고 있었던 이에게서 온 소포 같았다.
타운 센터의 스트릿 몰 모퉁이에 던킨도넛이 있다. 비교적 파킹장이 넉넉한데다 접근성도 편리해서 휴일에는 이른 아침부터 동네 노인들이 커피를 마시러 이곳에 모여든다. 어쩌면 커피는 핑계일뿐 사실은 사람이 그리운 이들이 모여 온기를 나누는 곳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작은 테이블에 둘러 앉은 이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쏟아 내었다. 조금 덜 외로워 보이는 이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고 이야기를 하는 이는 묵직한 외로움을 목청을 높여 토해냈다. 커피잔을 감싸안은 두 손이 따뜻해지는 그 시간 만큼은 각자의 민낯을 내보이며 묵혀 두었던 외로움을 덜어내는듯 보였다. 나이가 들면 외로움과도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데 웃고 있는 그들의 얼굴에는 세월을 건너온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기억에만 남아 있는 3월의 눈처럼 각자가 미처 드러내지 못한 외로움이 웃는 얼굴에 화석처럼 새겨져 있었다.
던킨 옆 건물은 이발소 자리였으나 코비드 이후로 2년 가까이 비어있다. 주인인 Tom은 이탈리아계 사람이었다.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안 이후로 마주칠때마다 그는 서툰 한국말로 반갑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한국전에 참전했었다는 말에 내가 감사의 인사를 했으나 그는 그때의 자신을 자랑스러워 하지 않았다. 단지 생계를 위해 군대에 지원했고 어느날 낯선 한국땅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참전의 경험은 그의 인생을 크게 바꾸어 놓았을 것이다.
전우들의 무수한 죽음을 마주하며 청년이 느꼈을 두려움과 삶에 대한 본능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지라도 나는 늘 그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침묵으로 공감해 주었었다. 그는 같은 자리에서 70년을 넘게 이발사로 일했다. 그의 자동차는 오래되고 낡은 포드로 시동을 걸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버거워 했지만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부자들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늘 가난한 사람에게도 부자에게도 한결같은 웃음으로 대했던 넉넉하고 따뜻한 사람이였다.
절대 은퇴는 하지 않을거라던 그가 코비드가 시작되던 엄중한 시절에 돌아오지 못할 길로 속절없이 떠났다. 70여년을 지켜냈던 그의 이발소는 그날 이후로 불이 꺼졌다. Tom은 특히 어린 아이들을 예뻐했는데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으로 떠나도 아이들의 아비에게 그들의 근황을 들으며 자기 아이들처럼 대견해 했다. 대학을 마친 그 아이들이 아비가 되어 타운으로 돌아오면 그들의 아이들도 그 이발소 손님이 되었다.
70년이라는 세월은 3대가 같은 이발소를 다니게 하는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뒤늦게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그를 추모하는 글을 적어 가게 유리창에 빼곡하게 붙어 놓았다. 그는 떠났으나 불꺼진 그의 빈 가게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 붙여 놓은 빛 바랜 메모가 마치 3월에 온 눈처럼 흔적으로 남아 있다.
쌓인 눈을 비집고 올라온 수선화가 마침내 노란 꽃잎을 열었다. 얼어붙은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소리없이 겨울이 물러서고 있었고 그 자리에 봄이 오고 있었다. 이제 내 소란스러운 흔적들도 모두 감추고 서둘러 봄 맞이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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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선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