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베를린 장벽 붕괴이후 형성된 국제질서를 뿌리째 뒤흔든 일대 사건이자 한 시대의 마감을 알리는 이정표다. 그렇다면 이제 막 개막된 새 시대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무엇보다 정치가 경제에 우선하는 시대이다. 지난 30년간, 지구상의 대다수 국가들은 경제성장을 지상목표로 삼았다. 그들이 수용한 교역과 첨단기술, 제도 개혁의 최종 지향점은 늘 성장이었다. 그 같은 선택은 국가 안보라는 핵심 이슈가 확실히 보장되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캐나다에서 독일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안보문제를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온 국가들이 방위태세와 국방력을 재검토하고 있다.
군사안보는 정치가 경제를 이긴 지극히 부분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세계 각국은 이미 수년 전부터 국가안보의 범위를 물품 공급망과 경제 분야로 확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브렉시트에서 ‘바이 아메리칸’ 캠페인에 이르기까지 자유시장을 추구해온 대다수의 국가들이 최근 몇 년 새 채택한 정책들은 한결 같이 시장경제가 아닌 포퓰리스트 민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번 주 초,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국의 식기는 중국산 식품으로 채워져야 한다.”며 정책입안자들에게 더 이상 국제시장에 식량을 의존해선 안 된다고 역설했다.
아마도 우리는 30년간 지속되어온 세계화의 반전을 목격 중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맥도널드는 러시아에 850개의 매장을 개설하며 나름대로 탄탄한 공급망과 소비자 기반을 확보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영업활동을 접어야했고, 경우에 따라선 전체 매장이 영구히 폐쇄될 수도 있다. 러시아 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 역시 곤경에 처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아에로플로트는 보잉과 에어버스 등 서방측 항공기 제작사들과 손잡고 노후한 자국산 여객기를 교체하는 등 대대적인 혁신 작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보잉과 에어버스가 부품 판매와 정비 지원을 중단하면서 아에로플로트는 조만간 항공기 운항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다급한 상황에 직면했다.
경제적 효율성보다 국가안보와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태도는 지역을 불문하고 가격인상 효과를 불러온다. 세계 각국이 과도한 해외 의존도를 줄이려 시도하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전이 불러온 공급충격이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해도 인플레이션은 새로운 시대의 항구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
우리는 또한 오일과 천연가스 가격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새로운 에너지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는 탄화수소를 생산하는 국가들이 향후 10년간 수조 달러의 현금을 거머쥐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블라디미르 푸틴의 최대 수입원인 오일과 가스 산업을 시급히 차단해야할 이유다.) 같은 맥락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와 같은 국가들이 세계 잉여자본의 공급원이 될 것이다.
신세계를 규정하는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포스트-아메리카 시대라는 점이다. 과거 30년간 유지되어온 팍스 아메리카나가 종말을 고한다는 뜻이다. 이를 암시하는 신호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월스트리트지 보도에 따르면 지난 수십 년간 국가안보를 워싱턴에 맡겼던 UAE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도자들은 미국 대통령의 전화통화 요청에 응하지 ?附年? 이스라엘과 인도는 푸틴의 군사행동을 침공으로 규정하는 것조차 거부했다. 이들 4개국은 러시아와 거래를 계속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언뜻 보면 새로운 세계 질서가 미국에 불리한 듯 보인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미국은 여전히 여타 국가들보다 훨씬 강력한 세계의 지도국이다. 게다가 새 시대의 몇몇 특징은 미국에 유리하다. 예컨대 미국은 탄화수소 주요 생산국이다. 높은 에너지 가격이 중국과 독일 같은 국가에게는 큰 부담이지만 미국의 경우 오히려 대다수 지역의 성장을 촉진한다.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워싱턴의 최대 경쟁국인 중국을 난처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행동을 두둔하다보니 오랫동안 관계개선을 위해 공을 들인 유럽연합(EU)과 등을 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우크라이나 사태로 절호의 전략적 기회를 잡은 주인공은 지난 수십 년간 국제무대에서 수동적 역할로 일관했던 유럽이다. 우리는 지금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고 나토의 동쪽 국경을 확보하는 등 유럽인들이 안보 무임승차를 끝내려 준비 중이라는 신호를 목격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확실한 신호는 독일의 괄목할만한 태도 변화다.
세계무대에서 유럽이 전략적 플레이어로 변신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이번 전쟁이 초래한 지정학적 지각변동이 될 것이다. 하나로 합쳐진 유럽이 미국과 손을 맞잡으면 진보적 가치를 지지하는 극강의 연합체가 형성된다.
그러나 하나로 뭉친 막강한 서방권 출현은 우크라이나전 승리라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바로 이것이 푸틴의 승리를 막기 위해 현시점에서 시급히 요구되는 비용과 위험을 감당해야할 확실한 이유다.
예일대를 나와 하버드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파리드 자카리아 박사는 국제정치외교 전문가로 워싱턴포스트의 유명 칼럼니스트이자 CNN의 정치외교 분석 진행자다. 국제정세와 외교 부문에서 가장 주목받는 분석가이자 석학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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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드 자카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