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출신 상속녀’, ‘뉴욕 상류층’, ‘사업가’
애나 소로킨을 묘사하는 단어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가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애나 만들기(Inventing ANNA)’는 지난 2월11일 공개되자 마자 전 세계 TV쇼 부문 1위를 차지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이 드라마는 애나 소로킨이라는 20대 여성이 독일 출신 상속녀 행세를 하며 뉴욕 상류층 사회에 접근해 금융 사기를 벌인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실제로 애나는 지난 2017년 절도 및 사기 혐의로 체포돼 2021년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후 애나는 자신의 이야기를 넷플릭스에 32만 달러에 팔면서 또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애나는 전형적인 리플리 증후군 환자다.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란 거짓말을 상습적으로 하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로 작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의 주인공 이름에서 인용된 것이다. 해당 소설에서 리플리는 부자인 친구를 죽이고 친구의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만들기 위해 친구 행세를 하며 살아가는 인물이다. 리플리는 죽은 친구인 척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스스로도 그 거짓말을 믿는다.
리플리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들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거짓이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반 거짓말쟁이들과 달리 리플리 증후군 환자들은 자신이 한 거짓말을 완전하게 믿고 있다는 차이점을 보인다. ‘애나 만들기’ 드라마에서 애나 또한 재판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마저도 자신이 ‘독일 상속녀’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만든 환상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정신 의학계에서는 환자들이 자신의 거짓말을 믿는다는 점에서 리플리 증후군을 병적 요소로 진단한다. 리플리 증후군 환자들의 거짓말은 대개 자신의 자존감을 극대화하고, 자신이 타인보다 뛰어남을 드러내기 위한 내용들로 이뤄져 있다. 전문가들은 리플리 증후군은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을 때,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거짓말로 모면하다 결국은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행동한다고 설명한다.
문제는 소셜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 드라마 속 애나처럼 가짜 자신을 드러내 유명세를 얻은 뒤 사기 행각을 벌이는 리플리 증후군 범죄자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지난 2020년 테슬라 초기 투자자로서 지분 1%를 보유한 척 부자 행세를 하다 논란에 휩싸였던 유튜버 카걸·피터 부부를 떠올려 볼 수 있겠다. 이들 부부는 자동차 관련 컨텐츠를 주로 올려 무려 30만명의 구독자를 가졌던 유명 유튜버로 대중들은 이 젊은 부부의 ‘부’에 매혹됐다.
‘일론 머스크 형님 옆집에 살아 대학생 신분에 대학교 등록금 정도를 투자했다’는 피터는 슈퍼카를 타고 다니며, 화려한 라이프스타일을 뽐낸다. 호화로운 모습을 통해 인기를 끈 이들 부부는 이윽고 ‘유퀴즈’에도 출연하게 되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 됐다. TV 전파를 타고 이들 부부의 모습이 전국민에게 노출되면서 거짓으로 꾸며진 삶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국 이들 부부는 각종 논란에 해명 및 사과한 뒤 모든 유튜브 영상을 비공개로 전환하면서 세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비단 유명인들만이 소셜미디어에서 가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셜미디어 속 가짜 인생은 어디서나 존재한다. 가짜 인생을 사는 이유는 그 무엇보다도 돈이 되기 때문이다. 금수저인 척, 잘 나가는 척, 똑똑한 척, ‘척척척’을 해야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 수 있는 세상이니까. 어쩌면 아무런 근거없이 탐욕과 허영으로 애나에게 투자했던 사람들, 부자 인플루언서에 열광했던 대중들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애나를 변호했던 토드 스포덱 변호사는 배심원들을 향해 말한다. “우리 모두에겐 애나 같은 면이 약간씩 있죠. 다들 거짓말 조금씩은 하잖아요.” 그의 말처럼 우리 모두 조금씩은 가짜 인생을 살고 있을까? 우리 스스로를 포함해 주변의 수많은 ‘애나’들은 여전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
석인희 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