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실에서 한국인 쇼트 트랙 코치가 영국 선수에게 열심히 작전 지시를 한다. 코치 바로 등 뒤에는 한국 선수도 앉아 있다. 지시를 받던 영국 여자 선수가 턱짓과 함께 코치에게 말했다. “쟤 듣고 있어요.” “괜찮아, 쟤 영어 못해.”
이 말을 엿듣게 된 한국 여자 선수, “저, 영어 아는데요-.” 까르르~, 영국 선수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면서 천천히 한국 선수에게 말해 준다. “I, Understand.” 그 전에 한국 선수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I, Am, Understand.” 바른 영어 표현을 일러준 것이다.
20 초 남짓 분량의 이 짧은 영상이 인기다. 유튜브 조회 수 170만 회를 넘었다. 경기를 코 앞에 뒀거나, 막 마친 듯한 선수들의 천진한 모습이 절로 미소를 짓게 한다. 코치의 한국식 영어는 뒤에 앉은 한국 선수가 더 잘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마침 이 광경을 건너편 벤치에서 지켜보던 동료 한국 선수도 빵 터지고-.
이 영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영국 쇼트 트랙 국가대표 코치도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현역으로 활동할 당시 세계 2위까지 올라간 한국 대표선수 출신이라고 하는데, 빙상계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 빙상계, 특히 쇼트 트랙에는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 코치처럼 세계 여러 나라에서 국가 대표를 이끌었거나 지금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스포츠 지도자들은 많다. 축구, 탁구 등 종목도 다양하다. 특히 태권도와 함께 국제 무대에서 한국이 초강세인 쇼트 트랙과 양궁은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다. 지난 주말 폐막된 베이징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 쇼트 트랙 선수들도 대부분 한국인 지도자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 여름 도쿄 올림픽 당시, 양궁 경기에 출전한 국가 가운데 7개국의 사령탑은 한국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미국, 중국, 일본 대표팀 감독도 포함돼 있다. TV 중계 화면을 보면 메달 색을 가리는 양궁 경기의 상대 감독으로 한국인의 얼굴이 비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지도자만 보면 올림픽 무대에서 종종 ‘한국 대 한국’ 대결이 펼쳐지는 것이다.
한국인 지도자가 화제의 주인공이 되거나, 국가적 영웅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이들에 의해 올림픽 무대에 처음 오른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 나라 최초의 올림픽 메달이 나오기도 한다. 이들 중에는 한국 국가대표 감독을 지낸 이도 있으나 선수 때는 무명이었다가 지도자로 성공한 사람도 있다. 외국 팀만 돌아가며 해외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도 있다.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인 말라위에 처음 양궁의 씨를 뿌린 이도 한국 여자 감독이었다. 과녁을 살 돈이 없어 담배 줄기를 모아 과녁을 만들어 썼다. 양궁 꿈나무들을 시장에 데리고 가 중고 운동화도 사 신겼다. 이런 선수들을 데리고 국제대회에 나가고 처음 올림픽에도 출전했다. 국제대회에서 만난 한국 선수단은 이들에게 양궁 장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 코치가 지난 해에는 부탄의 양궁 대표팀을 이끌고 도쿄 올림픽에 참가했다고 한다.
스포츠 지도에도 국경이 없다. 국경을 넘나드는 스포츠 지도자는 흔하다. 한국이 부족한 종목에는 외국인 지도자를 초빙한다. 평창 때 남북 단일팀 여자 아이스하키 감독은 갓 서른의 캐나다 여성, 이번 여자 컬링팀 감독도 캐나다 인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의 중국 쇼트 트랙 대표팀 감독과 코치는 한국인이었다. 한 사람은 한 때 한국에서 스케이트 날을 제일 잘 깎는 날 전문가로 꼽혔다고 하고, 또 한 사람은 유명한 올림픽 3관왕. 하필 이들이 중국팀 지도자라니. 이들을 배신자로 매도하고, 심지어 산업 스파이에 비유하는 비난까지 나왔다. 한국 쇼트 트랙의 기술을 유출했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 컬링 팀이 메달을 놓고 캐나다와 맞붙는 일이 벌어졌다면 캐나다 코치에게 이런 비난이 쏟아지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인공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축구 기술을 한국에 유출한 스포츠 산업 스파이라는 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