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16 쿠데타가 발생한다. 그리고 2년여의 군정 끝에 민정이양 약속과 함께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진다. 5대 대통령선거다.
대선에 뛰어든 후보는 모두 7명이었다. 여당후보는 박정희. 야당후보는 윤보선을 비롯해 허정, 변영태 등 당시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에다가 군 출신인 송요찬까지 가세해 모두 6명이었다.
여당후보 하나에, 여섯 명의 야당후보. 여당으로서는 아주 호조건의 선거판이었다. 그렇지만 야권이 하나가 돼 후보를 단일화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이를 어떻게 막아내나.
권력의 내부에서 은밀한 공작이 전개됐다. 이른바 ‘편지작전’이다. 각각의 야권후보자들에게 민초들의 편지가 수 천, 수 만 통이 배달됐다. 애국자로 추켜세우면서 대통령선거에 나서고 또 끝가지 선전해줄 것을 당부하는 절절한 내용의 편지 보내기 작전이 전개된 것이다.
편지공세에 시달린(?) 정치인들은 저마다 천운이 찾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결국 난립한 것은 야당 후보로, 뒤늦게 야권은 후보 단일화 노력을 펼쳤지만 대권은 박정희 차지가 됐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1987년. 20년이 넘는 군사독재에 진저리가 난 국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6월 민주항쟁이 발생한 것이다.
그해 6월 29일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가 국민의 직선제 개헌 요구를 받아들여 16년 만에 직선제 대통령선거가 실시됐다. 13대 대통령선거다.
그리고 펼쳐진 것이 1노-3김의 대결이다. 당시 야권 초미의 화두는 김영삼(YS)-김대중(DJ) 후보 단일화였다. 김종필(JP) 후보는 어차피 노태우 후보의 표를 깎아먹을 테니 YS와 DJ가 합치기만 하면 군정종식에, 문민정부 탄생은 확실시 됐기 때문이다.
이 정황에서 등장한 것이 ‘4자 필승론’이다. 영남은 노태우와 YS가 갈라 칠 것이고, 충청은 JP가 잠식한다. 그렇다면 호남이라는 철옹성이 버티고 있는 DJ가 승리한다는 논리다.
이 ‘4자 필승론’에 힘을 얻었던 것인가. DJ는 완주했다. 투표 결과는 그러나 노태우 37%, YS 28%, DJ 27%, JP 8%였다. 국민의 염원이던 군정종식은 그만 무산됐다.
“저는 이제 저의 길을 가겠다.” 국민의당 대통령후보 안철수의 선언이다. 스스로 제시했던 야권후보 단일화 안을 철회한 것이다.
여론조사로 단일화를 결정하자는 자신의 제안에 윤석열 국민의힘 측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안철수의 주장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국민의힘 대표라는 사람이 틈만 나면 안 후보를 조롱하는 것도 모자라 비난하는 글과 사진을 올리기도 했으니.
그러나 안 후보의 여론조사 요구도 진정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여론조사 지지율이 4~5배 차이가 난다. 그런데 별도 여론조사를 하자는 것은 한마디로 무리다. 여권 지지층에 의한 역선택을 바라고 있다는 것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것이다.
국민의 55%가 정권교체를 원하고 있고 동시에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바라고 있다. 이런 마당에 들려오는 단일화 약속이 깨지는 소리. 이유야 어찌됐든 국민적 염원을 외면하는 처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관련해 한 단어가 문득 떠올려진다. ‘학습효과’라 했나. 3류, 그도 모자라 4류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의 정치풍토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것이 이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 칠레에서는 1노-3김의 87년 대선과정이 면밀히 연구됐다. 그리고 이를 타산지석 삼아 민주세력은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를 축출했다.
그 대한민국에서 치러지는 20대 대통령선거, 정치권의 모습은 그런데 60년 전이나. 35년 전이나 별로 달라 보이는 게 없어 보여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