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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애국주의

2022-02-15 (화)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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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올림픽에 양궁이 있다면, 겨울 올림픽에는 쇼트 트랙이 있다. 올림픽 성적만 놓고 보면 이 두 종목은 한국으로서는 국기라고 해도 될 정도다. 한국은 쇼트 트랙 최강국이었다. 베이징 이전 역대 올림픽에서 쓸어 담은 메달은 48개, 절반이 금메달이었다. 중국과 캐나다가 2위권이지만 메달 수에서 한참 뒤쳐진다.

쇼트 트랙은 덩치나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순간 스피드를 생각하면 우선 경기장이 작다. 가로 60미터에 세로 30미터,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피겨와 쇼트 트랙이 같은 곳에서 열렸다. 타원형 트랙의 길이는 110여미터로 일반 스피드 스케이팅의 4분의1정도다.

승부는 곡선 주로의 주파 능력에 달려 있다. 일부러 오른쪽 스케이트 날을 휘어서 타는 선수도 있다. 양쪽 스케이트 날은 왼쪽에 치우쳐 있다고 한다. 시속 45킬로미터 내외의 속도로 곡선 구간을 비스듬히 질주하면서 밖으로 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서다. 고도의 균형감각은 필수. 쇼트 트랙 선수는 균형감을 관장하는 소뇌가 일반인 보다 큰 것으로 측정됐다.


쇠 젓가락으로 콩을 집어 올리듯 정교한 스케이팅 기술이 요구되는 쇼트 트랙은 한국인에게 잘 맞는 동계 스포츠로 발전했다. 미국 국가대표인 ‘팀 USA’에도 태권도 다음으로 한인 선수가 많은 것이 이 종목이다. LA 출신 클로이 김이 스노우 보드에서 2연패의 쾌거를 전한 이번 올림픽에도 한인 2세들이 쇼트 트랙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쇼트 트랙은 유달리 변수가 많은 종목이기도 하다. 경기 중에 뒤엉켜 넘어지거나 갖가지 규정 위반으로 실격되는 일이 빈번하다. 판정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남반구 최초의 동계 올림픽 금메달이 꼴찌로 들어온 쇼트 트랙 선수에게서 나온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앞선 주자들이 한꺼번에 넘어졌기 때문이다. 실력 보다 지나치게 운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건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한다면, 쇼트 트랙은 그 경계에 있는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어제의 ‘수혜자’가 오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이번 여름 올림픽과 겨울 올림픽은 6개월 시차를 두고 도쿄와 베이징, 모두 동북아에서 열렸다. 이 지역의 위상을 보여주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둘 다 기대했던 올림픽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 때쯤이면 끝날 줄 알았던 팬데믹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전해지는 뉴스 중에는 올림픽 답지 않은 것이 많다. 여기가 축제인지, 피난처인지, 전쟁터인지-. 특히 한국은 쇼트 트랙 판정 시비로 들끓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여름 올림픽 때 반일에 이어, 겨울 올림픽에서는 골이 깊은 반중 정서가 확인됐다. 이웃끼리 국민감정이 이래서야 위험 수위로 느껴질 정도다. 누구를 증오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불편하고 힘든 일인가. 동북아 3국의 지나친 민족주의를 우려하는 미국 조야의 시각도 있다.

반중에는 누리꾼이 앞장선다. 기회가 왔다, 정체불명의 유튜버들은 기름을 붓는다. 이런 이슈가 있을 때 자극적인 제목만 내걸어도 수 만회, 수 십만회 조회 기록이 어렵지 않다. 조회 수는 돈과 연결된다. 제목 장사에 넘어가 덜컥 낚시밥을 물고 보면 내용은 없고, 어떤 것은 거짓이고, 억지논리도 있다. 불량 식품은 단속하지만 불량 정보의 유통은 단속되지 않는다.

언론도 누리꾼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난 논조를 찾기 어렵다. 그것밖에 보이지 않아 그런지, 소신이 부족해 그런지-. 제기된 판정 의혹 중에는 차분한 해설과 함께 다른 각도의 화면을 보면 달리 보이는 것도 있다. 판정 시비와 중국이 싫은 것은 별개 문제다. 심판 판정에 대한 불만을 반중과 연결시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둘 사이에 검증된 인과 관계가 없지 않은가.

물론 중국의 속 좁은 애국주의가 문제로 지적된 것은 오래됐다. 중국이 들으면 펄쩍 뛸 지 모르나 요즘 일부 중국의 애국주의에서는 열등감이 읽힌다. 중국 근세사를 생각하면 일면 이해가 간다. 19세기 중엽 아편 전쟁 이후 이른바 서세 동점의 시대에 중국이 서구열강에게 당한 침탈의 역사는 참혹했다. 일본도 가해자의 일부였다. 어느 사회나 시간의 지층에 퇴적된 피해의식이 치유되려면 거쳐야 할 단계가 있다. 시간이 필요하다. 역사에는 도약이 없다.

그런 중국의 문화공정 시비는 무엇인가. 50여개 소수민족 대표가 두 손으로 오성홍기를 받들어 전달하는 것은 중국 국내 행사도 아니고, 올림픽 개막식에 맞지 않다. 중국이 떳떳하지 않기 때문에 연출된 장면이라는 비난이 나올 수 있다. 중국은 소수민족 인권탄압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의 빌미가 됐다. 경제 성장과는 별개로 중국 체제의 한계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지 않는가. 어떤 분야든 물 흐르는 듯한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문화가 세계를 선도할 수는 없다.

이런 중국은 반면교사가 됐으면 한다. 대응방법도 달랐으면 한다. 국민의식과 문화의 수준은 국토의 크고 작음이나, 인구의 많고 적음과 관계가 없다. 작지만 배울 나라는 많다. 지역적으로 가까우면 민족 간에 공유 범위가 넓은 문화가 많음도 인정해야 한다. 실익 없는 이슈에 부정적인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이 기회에 내 마음에 쇄국은 없는지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베이징 올림픽은 이런 생각들을 나게 한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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