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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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반짝이는 호기심=젊은 노년

2022-01-26 (수)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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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두 번이나 찾아온 팬데믹을 거뜬히 물리치고 지난주 108세 생일을 맞은 노인의 이야기가 LA타임스에 실렸다. 다운타운 벙커힐에 사는 모리 마코프 옹은 네살 때 스페인독감에 걸렸을 때 형은 사망했으나 그는 104도의 고열과 싸워 이겼다. 그리고 100년 후인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을 여유있게 넘어서 또 한 번의 생일을 맞았다.

마코프 옹은 100세에 첫 개인전을 가졌다. 할리웃에서 가전제품 수리점을 운영하던 시절, 틈틈이 버려진 고철들로 조각품을 만들었는데, 어느 날 한 갤러리 주인이 ‘작품’들을 보고 깜짝 놀라 전시회를 주선한 것이다. 그날 이후 마코프는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고, 103세에 “계속 숨쉬기”(Keep Breathing)란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이 물어온 장수 비결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의 아내 베티도 장수했는데 3년전 103세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코프 옹은 지금도 하루에 몇시간씩 글을 쓴다. 때로는 한 밤중에도 무슨 생각이 떠오르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끄적이는데 그렇게 쓴 글이 매주 30~40페이지나 된다고 한다. 아들 스티브 마코프는 “삶의 기쁨과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우수한 유전자”가 부친의 장수 비결인 듯하다고 말했다.


호기심이 삶의 중요한 원동력이라는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내 주위에도 그런 분들이 여럿 계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유년, 소년, 청년, 장년에 이르기까지는 신체적 정신적 성숙도가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젊을 때는 누구나 빛나고 아름답다. 하지만 60세를 넘겨 은퇴시점부터는 노화의 속도에 개인차가 크다. 이 차이는 70대와 80대, 그 이후에는 더 많이 벌어져서 같은 나이의 노인이라도 외적 내적 상태가 현저하게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된다.

가까운 친지 중에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두 사람이 있다. 현재 만 83세(1937년생)인 두 여성 중 한 분은 오래 전부터 과체중에 고혈압과 당뇨병, 관절염 등으로 거동이 불편하다. 워커가 없으면 걷지 못하니 병원 가는 일 외에는 거의 외출하지 못하고 간병인의 도움으로 생활한다. 제한된 조건 때문에 대인관계며 지적활동이 갈수록 위축되어가고, 삶에 대한 호기심은커녕 하루 종일 무엇을 먹을까, 무슨 약을 먹을까가 주요관심사다.

같은 나이의 또 한 분은 웬만한 젊은이들보다 젊다. 아직도 비즈니스를 하고 있고 얼마 전에도 뉴욕 출장을 다녀온 그녀는 인생 전반에 대해 끝없이 솟아오르는 열정과 호기심으로 만날 때마다 화제거리가 다양하다. 모습도 80대 노인이라고는 볼 수 없을 만큼 젊고 활기 넘치는데, 최근에는 메타버스와 암호화폐(NFT)에 대한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면서 열공 중이다.

친척 중에 잔병치레 한번 없이 96세에 돌아가신 분이 있다. 자그마한 몸으로 평생 쉬지 않고 집안일을 계속해온 이 분은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주변 사람들이 피곤할 정도였다. “얘, 저게 뭐냐? 이건 왜 저러냐?”하는 질문이 입에 달렸던 그 분을 50년 넘게 모시고 살아온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한없는 호기심에 질렸던 모양이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가는데 어머니가 또 창밖을 가리키며 “얘, 저기는 뭐하는 데냐?”하고 묻자 그만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 끝없는 호기심과 부지런한 집안일이 장수의 원천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가족들은 모두 동의하고 있다.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거의 20년 함께 와인을 마셔오는 동안 취향과 취미도 어느덧 같아진 6명의 여성들이다. 나이가 50대 3명, 60대 1명, 70대 2명인데 이 가운데 우리의 엉덩이를 차서 자극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사람은 가장 연장자인 70대 후반의 언니다. LA 타임스와 TV 시사뉴스를 꼬박 챙겨보시는 언니는 어디에 맛있는 식당이 생겼는지, 무슨 영화가 요즘 평이 좋은지, 어디서 좋은 전시와 음악회가 열리는지, 가장 먼저 소식을 알고 젊은 것들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그 언니 덕분에 화제의 영화를 보러 다니고, 그 김에 근처 맛집을 찾아 새로운 음식도 먹어보고, 책을 사서 돌려 읽고, 음악회도 함께 가게 된다.

작년 10월, 두 번째 연장자인 75세 친구의 결혼식이 열렸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타바바라 자택의 정원에서 해질 무렵 열린 웨딩은 너무나 아름답고 로맨틱했다. 하늘하늘 연한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가 얼마나 섹시하던지, 그걸 소화해낸 몸매를 바라보며 다들 감탄해 마지않았다. 더 놀란 것은 그녀의 부모님이었다. 97세 아버님은 꼿꼿한 걸음걸이로 신부를 데리고 멋지게 입장했고, 동갑인 어머님은 피로연 때 쩌렁쩌렁한 식사기도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노년에 나타나는 ‘평준화’에 관한 우스갯소리가 있다. 60대에는 예쁘거나 못생겼거나 외모가 평준화되고, 70대에는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지성이 평준화되며, 80대에는 돈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재산의 평준화, 그리고 90대에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별 차이가 없는 목숨의 평준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노년에 치매와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9988234(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다) 할 수 있는 조건은 1. 좋은 유전자 2. 평생에 걸친 육체적 정신적 관리 3. 사라지지 않는 호기심과 열정이다. 유전자는 선택할 수 없고, 관리는 좀 부족했더라도, 삶의 호기심만큼은 지금부터라도 의식적으로 찾아내고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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