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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 우리 모두의 필수적 삶의 방식

2022-01-04 (화)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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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쉽지만 행하기가 어려운 것들이 많다. 그 가운데 하나를 들라면 관용(tolerance)이지 싶다.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관용의 길은 말처럼 쉽지 않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혹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 중 정치관련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사이가 냉랭해졌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여당과 야당 지지자 사이의 대화에서도 경청이나 생산적 주고받음이 없다. 나와 정치적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외면하고 비난한다. 온라인에서는 이러한 소통의 대립과 단절이 더욱 심하다. 서로 주고받는 댓글을 보면 무례 비난 욕설을 넘어 섬뜩할 정도로 적대적인 경우를 본다. 때로 신앙인들이 모여도 서로의 구도적 삶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려하기보다 차이를 내세워 이단시 하거나 배척하는 경우를 본다.

요즘 관용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다. 관용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이다. 영어사전은 ‘비록 동의하거나 인정하지는 않지만, 누군가의 생각이나 태도가 자신과 달라도 그렇게 주장하도록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말한다. 두루 관용을 정의한다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으로, 자신과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의 인격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관용이란 ‘다름 속의 조화’를 뜻한다.


관용을 이야기할 때 가장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가 했다고 전해지는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우겠다”라는 말이다. 실제로 볼테르가 이 말을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 말은 관용의 성격을 매우 잘 드러내고 있다. 이 말은 나와 전혀 다른 상대방의 의견일지라도 설득의 대상이 아닌, ‘상대방의 다양성, 이질성, 주장의 다름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이 지점에서 관용은 개인적 덕목을 넘어 상대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을 통하여 배우고 진보하는 조화롭고 창조적인 사회,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사회적 가치의 의미를 지닌다.

관용해야 한다. 유네스코가 만든 ‘관용의 원칙에 대한 선언’을 담아 1996년 UN이 정한 ‘세계 관용의 날’은 관용이 우리의 모두의 삶의 방식 곧 인류의 삶의 방식이 되어야함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관용은 더 이상 한 개인의 도덕적 차원의 성품이 아니다. 관용은 나와 다른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을 큰 불편 없이 기꺼이 내 마음에 받아들이는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게 하는 내면의 덕목이며, 나와 다른 상대방을 관용함으로 그의 생각과 주장에서 배움을 얻으며 그와 평화의 관계를 유지해가는 관계의 덕목이다. 나아가 관용은 우리 사회의 언어, 피부색, 성적 정체성, 종교, 정치적 이념 등등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며 평화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평화적 삶의 방식이다.

관용을 배워야한다. 관용은 너무 어려워 실천 불가능한 덕목이 아니다. 관용을 연습해야한다. 관용은 자기 안에 자기와 다른 사람을 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관용의 삶을 사셨고, 성경은 ‘상대방을 품는 너그러운 마음’을(필립비 4:5) 가지라고 말씀한다.

튀니지의 수필가 알베르 메미는 “관용은 연습이며 우리 자신에 대한 승리“라고 했다. 관용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적극적으로 배우고 노력하고 실천해야할 현대인의 필수적 덕목이며, 동시에 함께 평화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소중한 사회적 가치이다. 관용 이제 우리 모두의 그리고 인류의 필수적 삶의 방식이어야 한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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