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말 의사 일로는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수표를 받았다. 오래 전에 본 환자에 대해 증언을 해달라는 법원의 통지서와 관련된 것이었다. 코비드 상황 때문에 법정이 아닌 화상 통화로 증언을 했다. 진실 외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선서를 시작으로 3시간 넘게 대답한 대가로 받은 돈이다. 일터를 떠난 지 1년8개월 만에 받는 수표다. 문득 ‘마지막 잎새’가 생각났다.
뉴욕의 외롭고 가난한 젊은 여자가 중병에 걸렸다. 그녀는 삶의 희망을 포기한 채 창문 밖으로 보이는 담쟁이 넝쿨의 나뭇잎이 다 떨어지는 날 자신의 숨도 멈출 거라고 믿는다. 같은 집에 사는 늙은 화가가 이 말을 듣고 바람 부는 어느 추운 밤 몰래 담장에 나뭇잎 하나를 그려 놓는다. 그녀는 후에 회복되었고 찬바람을 쐰 늙은 화가는 폐렴으로 죽고 만다. 인간애의 애틋함을 보여주는 오 헨리의 단편 내용이다.
내 서재의 책상 서랍에 두툼한 공책 두 권이 있다. 은퇴 직전 환자들이 원할 경우 나에게 작별인사를 적을 수 있도록 진료실 대기실에 비치해 두었던 공책들이다.
“이제는 나에 대해 걱정할 일이 없겠네요.” 어느 환자가 노트북에 적어 놓은 문구다. 만성 우울증을 가진 중년여자인데 증상이 악화하면 자주 삶의 매듭을 지어야겠다, 살기 막막하다,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말로 막연한 자살의도를 비쳤다. 그런데 걱정할 일이 없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자살계획을 다 세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스쳐갔다.
더구나 환자는 서양 사람인데도 불교신자였다. 불교는 현세를 고해로 본다. 그래서 죽음이란 마지막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후생의 전 단계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환자가 불교를 믿기에 은퇴 바로 전까지 매주 만나 자살 위험도와 자살 계획의 여부를 체크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마지막’이란 단어에 매우 민감했던 정신과의사였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 위험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했다. 앞의 환자처럼 미리 힌트를 주면 좋은데 아무런 의심도 안 했던 환자가 갑자기 자살을 하면 당황스럽다. 우울증상이 항상 계속되는 게 아니므로 밝은 표정을 보일 때도 가슴 밑바닥에 깃들어 있을 슬픔을 점검하는 게 중요하다.
몇 십년 동안 몸담았던 직장으로부터 은퇴, 최근에 받은 수표, 환자들의 작별인사 노트,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 오 헨리의 단편 등은 ‘마지막’을 떠올리게 한다. 마지막은 이렇게 두려움, 아쉬움, 허전함, 슬픔, 절박함 등 부정적 감정이 대부분이지만 때론 즐거움, 설렘 같은 긍정적 감정을 나타낼 때도 있다.
마지막으로 번 것일지도 모를 돈으로 무얼 할까? 처음엔 되도록 오래 지닐 수 있고, 어떤 의미를 간직하는 물건을 사려고 했다. 자주 가는 책방에 들러 책 몇 권, 값나가는 골동품 광대 인형, 그리고 고급 가죽배낭 하나를 더 살까하다 마음을 바꿨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 아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실행해 나가는 계기로 삼는 게 좋을 듯 했다.
분석 심리학자 에릭슨은 노년기를 지나간 삶을 평가하고 결산하는 시기로 정했다. 나는 평가 결산뿐 아니라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삶을 자신답게 살아가는 시기로 생각한다. 지구촌의 자원을 적게 쓰는 미니멀리스트의 단순한 삶을 사랑한다. 좀팽이 늙은이란 소리를 들어도 종이 한 장, 플라스틱 한 개도 아끼고, 물과 전기도 될 수 있는 한 덜 쓰는 생활을 계속하고 싶다.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촌의 강자로 군림한 이래 기술문명은 발달해왔다. 그 과정은 우리의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지구촌의 자원과 환경을 마구 훼손하는 부작용도 낳았다. 화석연료, 산더미 같은 쓰레기, 갑자기 나타난 코비드 그리고 기후환경의 변화는 인류와 지구를 위협하고 있다. 이젠 덧셈을 멈추고 뺄셈을 시작할 때다.
새해엔 능력이 미치는 한도 내에서 병든 지구촌을 돕는 운동에 참여하고 싶다. 작은 나비의 미미한 날개 짓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앞으로 올 세대를 위하고, 삶의 질을 높이며, 삶을 더 사랑하는 보람된 일이 아닐까 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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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