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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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체스터 이야기 - ‘웨체스터 찬가’

2021-12-27 (월) 노려/전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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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 터널 같은 세월이다. 이제는 끄트머리까지 왔나 해도 빛이 아직도 보이질 않는다. 올해도 “즐거운 연말연시와 희망찬 새해를 맞으세요.”라는 인사는 접어야 하는 건가.
우리 집의 현시세를 보더니 ‘혹시 숫자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1980년 말 우리집과 비슷한 플러싱 집 값은 충분히 4, 5배가 올라있기 때문이다. 팬데믹 세월을 지내며, 더 답답하게 느껴졌었다. 할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었다. 처음부터 플러싱이나 뉴저지에 자리를 잡았으면 좋았을 텐데 했다.

그당시 뉴저지에 괜찮은 집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재정으로 이곳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럼에도 웨체스터를 고집한 이유는 고달픈 타향살이에, 겨우 마음을 붙인 웨체스터에서 다시 강을 건너 낯선 땅으로 가고 싶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작은 집으로 이사를 와서 보니까 학군이 좋았다. 학부모들이 모두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조금만 나서면 허드슨 강이 보이고, 숲과 호수가 있어 초원을 방불케한다.


‘웨체스터 하우스 와이프’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동네 여자들은 남편이 벌어오는 엄청난 돈으로 흥청거리며 사는 것으로 영화나 소설에 그려진다. 나하고는 상관없지만.
내 아이들이 아이덴티티에 시달렸다는 걸 안 것은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였다.

몇 년 전 갑자기 조용하던 거리에 성조기를 달고 확성기로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며 샤핑몰로 부르릉 몰고 오는 지프차 부대라던가, 길거리에서 피켓들로 외치는 사람들이 나타난 걸 일시적인 일로 여겼는데, 며칠 전에도 소우밀 샤핑 몰에서 그런 식의 시위자를 보았다. 가까운 친지들이 세금과 생활비가 싼 타 지역으로 옮겨가거나 자식들 곁으로 가던지 또는 이 세상을 떠났다.

웨체스터 한인 타운에 대한 기대는 사라진 듯하다. 더구나 전쟁이 이랬을까 싶은 팬데믹이 겹치고 그나마 오래 버티던 한국식당이 문을 닫고 나니, 적막강산이 따로 없다.
한인 타운을 가면 가끔 가곤 했던 식당이 그 자리에 없어서 당황을 하기도 한다. 새 건물이 들어선 거리들,어디가 어딘지 모를 때가 있다. 하지만 웨체스터는 어딜 가나 옛모습 그대로다. Staples와 Toys R Us만 없어졌을 뿐, 구두방서부터 영화관까지 거의가 정이 담뿍 담겨있다. 어린 애들을 데리고 가던 이태리 식당에 어느새 아이들 부부와 같이 가며 추억을 더듬는다.
또 있다. 동네 수녀원 숲엘 가면, 어느 깊은 산속에 온 기분이다. 앙상한 나무와 나무를 칭칭 감고있는 밧줄 같은 덩쿨, 낙엽바다 위로 섬처럼 듬성듬성 솟은 이끼 낀 작은 바위들. 길다랗게 쓰러진 고목 등걸 그 위를 덮은 꽃처럼 피어난 버섯의 향연에 심취한다. 다정한 거리, 아름다운 웨체스터다. 눈보라 쳐도, 봄이 또 오고, 여름이 가고, 낙엽이 지는 아름다운 웨체스터에서, 웨체스터에서 살으렵니다.

<노려/전 웨체스터 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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