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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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느끼며 - 동네 한 바퀴

2021-12-10 (금)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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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초 처음 뉴욕에 와서 13년동안 플러싱 149가 바클레이 스트릿에 살았다. 그곳에서 12번 버스 타고, 7번 전철 갈아타고 퀸즈보로플라자 역에 내려 27가에 있는 신문사로 출근 했었다. 그런데 올 9월25일 신문사가 플러싱 한인타운 먹자골목으로 이사를 왔다.

아스토리아에서 차로 출퇴근을 하자 가족들이 “다시 친정으로 돌아간 기분이 어때?” 하고 묻는다. 그렇다. 30여년 전 이민 초창기의 온갖 추억이 동네 구석구석마다 도사리고 있다.

차가 없던 시절, 아침마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그 앞에서 버스를 탔다. 학교 옆 샌포드 애비뉴와 머레이힐 스트릿 건널목에는 여성 크로싱 가드가 있었다. 어린 학생들이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호루라기를 불면서 길을 안내하는 그녀는 한여름이나 강추위에도 늘 단정한 단발머리와 미니스커트 제복 차림으로 제자리를 지켰다.


상록회관은 지금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 당시 70대 시어머니가 시민권 공부를 하러 다니던 곳이다. 149가 건널목을 건너드리면 어서 직장에 가라고 손짓하면서 시민권 책을 들고 걸어가던 뒷모습이 기억난다. 민속식당에 순대를 사러갔었고 일요당직 시 놀부김밥에 김밥을 사러 갔다.

41애비뉴와 149스트릿 코너에는 월드 비디오와 세븐 일레븐이 있었다. ‘모래시계’ 비디오가 나오는 날이면 비디오를 빌려 밤새워 보았고 한밤중에 아기 우유와 기저귀를 사러가기도 했다. 지금 그곳은 메디케이드 병원차량 서비스와 월드 약국으로 변했다.

머레이힐 기차역은 주말에 맨하탄 나들이를 갈 때 이용하던 곳이다. 허름한 역에 승차객이 별로 없어 무섭기도 해 멀리 기차 오는 기척이 들리면 그때야 승강장으로 내려가곤 했었다. 지금은 지붕달린 멋진 역사를 갖추었고 주위는 식당, 커피샵, 노래방, 미용실, 론드리, 델리, 변호사 및 회계사 사무실 등 100여개 한인업소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이 동네가 이른 바 먹자골목이다. 플러싱 149~150가와 루즈벨트 애비뉴~41애비뉴 사이 블럭으로 롱아일랜드 철도 머레이힐 역이 그 중심에 있으며 2블럭 가면 북쪽 노던한인상권과 연결된다.

이곳은 2,000년대에 젊은 층을 겨냥한 식당과 주점이 대거 생기면서 금융 위기와 불경기 속에서도 신흥상권으로 각광을 받았었다. 맨하탄에서 타인종 젊은이들이 기차를 타고 머레이힐 기차역에 내려 맛집을 찾아왔었다. 한창 한인상권이 발전하는 중인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겼다. 바로 먹자골목 149가 다리가 막혀버린 것이다.

콘크리트 교량 상판 교체 작업으로 차도와 인도가 전면 통제되었고 공사 중지, 다시 공사 등 우여곡절 끝에 7년만인 2016년 8월 재개통을 이루었지만 이미 한인상권은 타격을 입었다. 지난 2년간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또다시 침체 중이지만 그래도 장사가 잘 되는 집은 잘 된다.

요즘, 점심시간마다 먹자골목 동네 한바퀴를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데 두달이 지나자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이 있다. 상권을 부활시키고 젊은이들을 불러모아야 한다는 마음에서다.


첫째 전문 식당을 내세워 특화된 맛집 거리를 조성해야 한다. 타인종을 위한 메뉴표기, 조리법 등 정보 및 먹자골목 안내서가 있어야겠다. 둘째 창고로 쓰이는 옥외영업장을 철거하여 주차공간을 돌려놓고 거리를 청소하자. 안전 및 치안을 위해 가로등 및 CCTV 설치도 더 많아져야겠다.

세째는 볼거리가 있어야겠다. 머레이힐 기차역 일명 최윤희 광장에서 동네주민 노래자랑, 게릴라 전시회, 작은 음악회 등등 이벤트가 계속 있어야한다. 한국음식 박물관이나 문화관도 필요하다.

화제가 되고 사람이 모여야, 특히 마음이 맞는 사람이 자주 만나야 한인상권이 일어난다.
그동안, 단 세 번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는 한인을 보았다. 반가웠다. 깨끗하고 안전한 거리는 지역주민의 자부심을 높인다. 한인상권의 부활을 위해서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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