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4지, 레터지, 16절지… 비슷하지만 다른 종이
미국에 도착한 지 몇 달 안되어서의 일이다. 컴퓨터로 문서를 하나 만들고 프린터로 출력을 했는데 인쇄물이 이상하게 나왔다. 컴퓨터 화면에서는 내가 원하는 대로 페이지가 나뉘어져 있는데 출력된 인쇄물에서는 엉뚱한 곳에서 페이지가 나뉘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컴퓨터 화면에 나타난 것을 조정해가면서 여러 번 출력을 반복하고 나서야 원하는 출력물을 가질 수 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출력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한참 지난 후에 우연히 종이를 싼 포장지를 보고 나서야 한국과 미국은 종이 규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우리는 대부분 A4용지를 쓴다. A4보다 조금 큰 B4용지는 주로 업무용으로 사용한다. 물론 그 외에 다른 크기의 종이가 있지만 A4와 B4가 가장 널리 쓰이는 크기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는 그 크기가 세계 모든 곳에서 사용되는 유일한 규격인 줄 알았다. 16절지, 8절지 대신에 등장한 이 종이 크기를 나타내는 표현이 영어로 시작하기에 A4, B4 등의 규격이 세계 공통일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데 미국은 종이 크기를 말할 때 A4, B4가 아니라 레터(Letter), 리걸(Legal)이라는 표현을 쓴다. 종이의 크기를 표현하는 것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혹시?...’하는 마음으로 컴퓨터의 인쇄 설정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인쇄 설정이 한국에서 쓰던 그대로 A4로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즉 컴퓨터의 인쇄 설정에는 종이 크기를 A4로 지정해 놓고 프린터에 넣은 종이는 레터였던 것이다. 그러니 출력이 이상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쇄 설정에서 종이 크기를 레터로 바꾼 후에는 컴퓨터 화면에서 페이지를 나눈 대로 인쇄 출력이 되었다. 인쇄 설정을 바꾸기 전까지는 인쇄할 때마다 고생에 고생을 했었다.
그럼 A4와 레터는 얼마나 차이가 있는지, B4와 리걸은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자. 세로로 놓았을 때를 기준으로 종이의 크기를 비교해본다.
A4는 210mm x 297mm이고 레터는 216mm x 279mm(8.5인치 x 11인치)이다. A4가 가로로 6mm 짧지만, 세로로는 26mm 길다. 이 차이 때문에 그리도 고생을 했던 것이다.
B4는 257mm x 364mm이고 리걸은 216mm x 356mm(8.5인치 x 14인치)이다. B4가 가로로도 41mm 길고, 세로로도 8mm 길다. 즉 B4는 가로로도 세로로도 리걸보다 크다.
A4와 B4는 가로 길이도 다르고 세로 길이도 다르다. 그런데 레터와 리걸은 가로 길이는 둘 다 같고(216mm), 세로 길이만 다르다(279mm / 356mm).
재미있는 것은 종이의 크기를 말할 때 미국 땅에서도 A4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 표현은 미국 사람이 쓴다는 것이 아니고 한인이 사용한다. 한인이 A4라는 표현을 쓴다고 해서 인쇄할 때 진짜로 A4를 사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서 A4를 판매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미국 땅에서 A4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레터가 A4와 비슷한 크기이기 때문에, 레터 대신에 A4라고 적는 사람이 있다는 것뿐이다. 미국 땅에서 한인이 제일 많아서 ‘서울특별시 나성구(羅城區)’라고 불리는 LA의 경우에는 신문사에서 문예공모 공고를 할 때에 응모작품의 종이 규격으로 A4라는 표현을 쓴다.
지금 우리는 A4, B4라는 크기의 종이를 쓰지만 다른 표현의 종이 크기가 있었다. 16절지, 8절지처럼 뒤에 ‘절지’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크기가 그것이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A4, B4 같은 규격이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적으로 사용되었던 규격이다. 절지(切紙)는 전지(全紙)를 나눈(切) 종이(紙)라는 뜻이다. 전지(全紙)란 종이를 만들어 롤에 감은 후 처음 나누는 단위이다. 16절지(切紙)는 이 전지를 16으로 나눈(切) 종이(紙)이고, 전지를 8로 나눈(切) 종이(紙)가 8절지(切紙)다. 8절지는 B4에 가깝고, 16절지는 A4와 가깝다.
크기를 살펴보면 전지 788mm x 1090mm, 2절지 545mm x 788mm, 4절지 394mm x 545mm, 8절지 272mm x 394mm(B4 257mm x 364mm), 16절지 197mm x 272 mm(A4 210mm x 297mm), 32절지 136mm x 197mm이다.
절지의 시발점이 되는 종이가 전지다. 그 옛날 학창 시절 환경미화 심사 준비할 때 교실 뒤편에 커다란 종이를 붙이고 그 위에 여러 학생 작품을 붙인 것이 있었다. 그때 바탕의 그 커다란 종이가 전지이다. 16절지는 공책의 크기이고, 8절지는 학교에서 시험 볼 때 시험지가 인쇄되던 그 종이의 크기이다. 국민학생 때 출판사에서 나온 세로로 된 수련장, 그것도 8절지이다. 16절지 연습장으로 시험공부를 하고, 8절지 시험지로 시험을 본 경험이 있다면 나이가 퍽 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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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지난해 한국일보 문예공모전 수필부문 가작에 입상한 수필가로 버지니아 스프링필드에 거주 중이다. 서울 출신으로 중앙대학 법대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