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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에세이] 고슴도치 환자

2021-12-01 (수)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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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두어 달 남겨둔 어느 날 젊은 남성이 중년부인 손에 이끌려 오피스로 들어왔다. 남성은 흥분된 상태로 이 말 저 말을 하고, 말도 너무 빨라 알아듣기 힘들었다. 대기실에서 유행가를 부르며 춤을 추는 등 시끄럽게 굴어 옆의 환자들이 조용히 하라고 하자 싸움을 할 듯한 기세였다. 남성은 마약을 복용했거나 양극성 장애의 조증 상태로 보였다.

아들이 술이나 마약에 손댄 일은 없으나 몇 년 전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았다는 어머니의 말이다. 양극성 장애 약을 먹을 땐 직장 일도 잘하고 여자 친구와도 잘 지냈는데, 약 부작용 때문에 약을 끊고 몇 달 지나면 다시 증상들이 나타나 입원치료를 받곤 했다. 그러던 중 자신에게 잘 맞는 약을 찾았다. 클로노핀(Klonopin, 제네릭 명 Clonazepam)이다. 아들은 딴 치료 약물들은 거절하고 오로지 클로노핀만 고집했다. 클로노핀으로 증상이 조절되어왔던 것이다.

클로노핀은 불안증세, 공황증세를 치료하는 진정제로 약물의 절반이 몸속에서 없어지는 시간이 길다. 보통 복용 후 1시간 이내에 효과를 느끼고, 효력이 지속되는 시간 또한 길다. 참고로 재넥스(Xanax-Alprazolam)와 아티반(Ativan-Lorazepam)은 짧은 하프 라이프 진정제로 효과가 30분 이내에 나타나고 몸속에 유지하는 기간이 짧다.


지금은 재낵스 남용이 많아 의사들이 클로노핀을 흔히 처방하지만 이 역시 장기 복용하면 의학적(내성, 의존성, 중독), 사회적(남용, 범죄) 부작용을 야기한다. 진정제는 매일 복용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사용하며, 한 달 이상 계속 먹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임상에서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 효과가 너무 좋아 환자들이 약을 끊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앞의 젊은 남성은 증세가 심해 단기간 입원치료를 권했으나 환자가 거부했다. 클로노핀만 처방해주면 증세가 좋아질 거라 장담했다. 강제입원 대상이 아니라서 일주일분 약을 주며 환자에게 복용 3일 후 전화로 상태를 알리고 일주 뒤에 다시 오라 일렀다. 환자의 상태는 약 복용 후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대화 중 “어머니가 저보고 고슴도치래요, 정말 그래요?” 하고 물었다.

고슴도치는 두더지 과에 속하는 포유동물로 주로 밤에 활동해서 사람 눈에 쉽게 띄지 않지만 희귀 동물은 아니다. 먹거리가 있는 쓰레기 통 근방에서 가끔 만날 수 있다. 고슴도치의 가시는 사실 털이다. 먹고 먹히는 동물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털이 아주 강하고 뾰족하게 진화했다. 고슴도치는 추위에 약해 서로 몸을 기대어 보온이 필요한데 너무 가까이 하면 털에 찔려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환자는 어려서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어머니 손에 자랐다. 어머니는 일종의 죄의식 때문에 아들이 원하는 것을 거의 모두 들어주었고, 그러다 외롭고 지친 나머지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환자는 겉으로는 버릇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망나니처럼 보였으나 속으론 항상 두렵고 불안하고 의심이 많고 매사에 자신이 없었다. 조증상태가 오면 정반대의 성격이 나타나곤 했다. 일반적으로 의심이 많고 자폐성향이 강한 사람을 고슴도치 같다고 한다. 누굴 믿거나 애정을 주고받지 못한다. 혹시 누군가가 자기를 해칠까 신경을 곤두세운다. 더구나 부모의 이혼, 죽음, 심한 신체적 정서적 상처를 경험하면 타인과 거리를 두고 자신이 만든 덫 속에 빠져 산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고슴도치 신드롬이라 부른다.

이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약물치료와 카운슬링 즉 상담치료다. 앞의 환자는 첫째, 타인과 친해지고 싶고, 둘째, 나쁜 아버지와 연약한 어머니 때문에 자신이 희생자란 생각을 멈추고 싶고, 셋째,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상담자는 조언능력과 공감능력을 갖추어야한다. 이를 바탕으로 대화를 통해 환자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게 중요하다. 믿음은 생후 세살 이내에 형성되며 믿음의 근간은 애착관계다. 먼저 환자에게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면 자기에 대한 믿음, 나아가 세상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여기에 초월적 존재인 절대자로부터 영적성장을 배우면 세상 살기가 편해질 듯싶다.

<천양곡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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