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다 이유가 있더라니까.” 주름진 눈가 사이로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은퇴 동료의사가 말했다. “무슨 일인데?”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지 궁금하여 물었다. “근데 재미도 있더군.” 그는 내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지나가는 말로 대신한다. “자네, 또 그 인생결정론인가 그것 설파하는 거 아냐?” 나는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좀 귀찮은 일이 있었다. 어느 날 등기우편이 날아왔다. 법원 소환장으로, 그가 예전에 보았던 환자에 대해 증언하라는 통지였다. 문제는 그 환자를 본 지가 너무 오래돼 기억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다행히 변호사 사무실에서 환자기록을 첨부해왔다. 알아보니 환자가 강도 살인죄와 성폭력 죄로 복역 중 진범이 체포되어 감옥에서 풀려난 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한 케이스였다. 감옥에 있던 중 그는 옆집 노파의 지갑을 뺐고, 강간하고 죽인 나쁜 자식으로 알려져 다른 죄수들로부터 숱한 구타와 수모와 조롱을 받았다.
선서증언(Deposition)은 법정이 아닌 변호사 사무실에서 행해지지만 판사가 참석치 않은 것을 제외하곤 과정이 똑같다. 동료 의사는 소환 요구와 선서증언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처음에는 화가 났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난 후 생각을 바꿨다. 환자를 도와주어야겠다는 연민의 정을 느꼈다. 일주일 동안 자신의 환자기록을 세세히 검토하며 잊어버렸던 정신과지식을 찾아내고, 새로운 지식을 보충했다. 그리고 불쌍한 환자를 도와줄 기회를 마련해준 이번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게 아니라는 인생결정론을 그는 새삼 확인했다.
살면서 겪는 모든 일은 우연히 일어나지 않는다. 다 이유가 있다. 눈에 확 보이는 분명한 이유는 아주 적고, 대부분 자신도 알아차릴 수 없는 무의식 속에 잠겨있다. 꿈의 해석과 자유 연상을 사용하는 정신분석을 통해 이를 찾아내야 한다는 게 프로이드의 정신결정론이다. 반면, 물리학은 세상 모든 일은 빅뱅으로 우주가 형성된 것처럼 원자들의 무작위 행동에 의해 우연히 일어날 뿐 무슨 이유나 목적이 없는 자연현상이라 잘라 말한다. 인류심리학자들은 정신결정론에 반기를 든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무의식이 지배하는 것이 아닌 주어진 현실의 상황과 환경에 적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우연인가 필연인가의 논쟁은 종교와 과학, 운명과 자유의지, 유전과 환경, 불가항력과 범죄행위 등 삶의 여러 영역에 맞물려있는 문제다. 연어의 애기를 해보자. 연어는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가는 도중 숱한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헤엄을 계속한다. 만약 연어가 죽음의 위험을 알아차린다면 가지 않을까? 연어의 몸속에는 태어난 곳으로 가라고 누군가가 이미 프로그램을 해놓았기에 따를 수밖에 없다. 운명이고 숙명이다.
인간은 연어와 달라 지혜가 있어 위험을 알면 생각을 바꾸는 힘이 있다. 인간의 의지로 운명을 거스르는 그런 힘은 평상시에는 쉽게 생기지 않는다. 아주 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릴 때 나타난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한 예다.
우리의 삶은 우연과 필연이 함께 작용하는 이율배반적 관계로 이루어져있다. 삶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는 지혜와 경험에 따라 우연과 필연의 저울추가 달라진다. 동료의사의 얘기를 들으며 내 삶을 되돌아볼 때 예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이라 믿고 싶다. 즉 운명의 열쇠를 쥔 누군가의 힘, 그리고 나 자신이 쌓아올린 의지의 힘으로 살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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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양곡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