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 된 손자는 방바닥에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쉽게 앉는다. 그리고 일어설 때는 일어선다는 의식 없이 가볍게 뚝 일어난다. 손자는 계단을 쉽사리 오르고 내린다.
늙어지니까 내 몸뚱이가 내 말을 안 듣는다. 방바닥에 앉는 것도 쉽지 않지만, 일어서는 것은 더더욱 힘이 든다. 계단에서 뛰어내린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계단을 오르고 내릴 때, 나는 꼭 난간을 한 손으로 붙잡고 조심스레 올라가고 내려온다. 생각해봐요! 나는 지난 80년 이상을 매일 걸으면서 그리고 걷기 운동하면서 다리를 단단하게 해놓았고 아령을 하면서 팔뚝을 튼튼하게 해 놓았다.
그런데 웬 말인가! 네 살밖에 안 된 손자보다도 더 약한 인간이 되어버렸다. 늙어지니까 내 몸뚱이가 내 말을 안 듣고 있는 것이다.
내가 몸뚱이를 매일 먹여주고 보살펴주고 있다. 몸뚱이의 주인은 ‘나’이니까, 몸뚱이는 나의 말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무릎이 자주 아프다. 무릎에게, “야 무릎아, 이제 그만 아파라!.”하고 말해준다.
그러면 아픔이 없어져야 할께 아니겠는가. 그런데 계속 아프다. 진통제를 먹는다. 걸을 때는 ‘주인’인 내가 오히려 무릎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레 걷는다.
무릎뿐만 아니라, 허리며, 배며, 심장 등등, 내 몸뚱이는 내 말을 안 듣는다. 내 허락도 없이 아파버린다. 몸뚱이가 내 말을 안 듣는다면, 그렇다면 몸뚱이는 도대체 누구의 말을 듣고서, 나에게 거역해서, 아파버릴까?
부처는, “몸은 덧없는 것이다. 덧없는 것은 곧 괴로운 것이다. 괴로우면 ‘나’(我)가 없다. ‘나’가 없으면 곧 공(空)이다. 공이면 그것은 내 소유가 아니요, 나도 그의 소유가 아니다.”(증일아함경)라고 말했다.
내 몸뚱이는 인연에 의해 만들어졌고, 그리고 인연이 다하면 또한 없어져버리기에 몸뚱이는 내 소유가 아님과 동시에 나도 몸뚱이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 고등학생이 있다. 한 학생은 열심이 공부를 한다. 좋은 실력(좋은 업)을 쌓는다. 다른 학생은 게으름을 피운다. 공부를 안 했기에 나쁜 실력(나쁜 업)을 짓는다. 둘이는 명문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한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학생’ 사람을 보고 뽑지 않는다. 두 학생의 ‘업’(실력)을 보고서 뽑는다. 업(실력)이 좋은 학생은 명문대에 들어간다. 업(실력)이 나쁜 학생은 입학되지 않는다.
부처는, “전생에 살생(殺生)을 많이 했거나, 도둑질을 많이 했었다면, 업이 나쁘기에, 죽어서 마땅히 지옥에 갈 것이지만, 만약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자주 아프고, 수명이 짧고, 그리고 가난하게 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프고 늙어지고 죽는 것은 우리가 과거에 지은 업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가 아니라, 업이 몸뚱이의 주인인 것이다.
무릎더러 아프지 말라고 하지 말고, 그 대신 매일 걷기 운동을 해서 좋은 업(무릎근육이 단단해짐)을 만든다. 몸뚱이는 업의 말을 듣기에 무릎 아픔이 완화된다.
다음 생에 장수, 건강, 총명, 부유(富裕) 등 좋은 복을 갖고 태어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좋은 업’을 지금 지어놓을 수 있을까? 살생·도둑질·거짓말·음행을 하지 않으면서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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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내/컬럼비아 의대 임상 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