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5일 최종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한국의 야당 국민의 힘이 국민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의 세부 문항 결정을 놓고 후보들 간에 팽팽한 기 싸움과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본선 경쟁력을 묻기로 한다’는 원칙만 결정됐을 뿐 어떤 방식으로 이것을 물을지 구체적인 방식은 결정되지 못한 상태이다.
가장 쟁점이 큰 사안은 여론조사 문항을 ‘양자 가상대결’로 할 것인가 아니면 ‘4지 선다형’으로 할 것인가 여부이다. 양자 가상 대결이란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놓고 국민의 힘 후보를 각각 한 명씩 선택지로 해 질문을 하는 방식이다. 반면 4지 선다형은 국민의 힘 후보 4명의 이름을 제시한 후 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상대로 누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묻는 방식을 의미한다.
여론조사의 결과는 표본 추출에서부터 조사원이 어떤 방식으로 묻는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수들이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질문을 어떤 내용으로 작성해 던지느냐 역시 설문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역선택’을 우려하는 윤석열 캠프는 양자 대결 질문을, 일반 국민여론조사에서의 우위를 절체절명의 목표로 하고 있는 홍준표 캠프는 4지 선다형 문항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는지를 떠나 여론조사의 질문 방식 하나만으로도 결과가 영향을 받고 그 결과에 따라 5년 간 국정을 이끌어 갈 국가지도자가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지극히 우려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은 이미 ‘여론조사 공화국’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을 얻은 지 오래다.
여론조사는 한국사회에서 여론의 정확한 동향을 집어주는 ‘풍향계’ 역할을 상실하고 있다. 대신 여론을 조성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 가는 ‘플레이어’가 되려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같은 기간 실시해 같은 날 발표된 여론조사인데도 결과들이 들쭉날쭉이다.
여론조사의 취약성을 거론할 때 고전적인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것은 노무현과 정몽준이 대선후보 단일화를 위해 2002년 실시한 여론조사이다. 누가 후보가 되어야 결정하기 위해 두 회사를 고용해 실시한 조사에서 노무현이 앞섰다. 문제는 두 조사 결과 사이의 편차이다. 노무현은 한 조사에서 4,4% 포인트 앞섰지만 다른 조사에서는 단 1.8% 포인트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재미있는 것은 두 조사가 똑같은 질문지를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같은 질문지를 사용해도 표본을 어떻게 추출하고 조사원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정치에 있어 여론의 추이를 제대로 읽은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그저 참고의 대상의 돼야 할 표피적인 여론조사가 중대한 결정과 결론의 근거로 전가의 보도인양 받들어지고 있는 현실은 지극히 무책임하고 위험해 보인다. 당내 경선에 일반인들의 여론조사를 반영하는 것이 ‘한국적인 창조물’일지는 몰라도 정당정치의 근본정신에는 부합되지 않는다. 또 여론조사의 지나친 오·남용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검증되지 않은 포퓰리스트의 부상을 초래할 위험도 있다.
그래도 대통령을 뽑는 과정이 온통 여론조사들로 점철돼 있는 ‘여론조사 공화국’에서 마지막 절차가 전화 여론조사가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내년 3월9일 실시될 대선 투표야말로 그 어떤 왜곡도 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확인하는 단 하나의 진정한 여론조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든 유권자들이 깨닫고 분명한 판단력과 유례없이 높은 응답률로 화답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