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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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함께 하는 시간들

2021-10-15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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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 한해의 마지막이자, 가장 사랑스러운 미소.” 19세기 미국시인 윌리엄 컬런 브라이언트의 가을 예찬이다. ‘위대한 개츠비’를 쓴 F. 스콧 피츠제럴드도 가을을 좋아했다. “가을이 되어 날이 상쾌해지면, 삶은 완전히 다시 시작 된다”고 이 계절을 반겼다.

완연한 가을이다. 팬데믹의 제약으로 늘 뭔가 미진함 속에 어물어물 하다 보니, 시간은 흘러 10월 중순이다. 눈 깜짝할 사이 11월이 되고 12월이 되며, 2021년은 저물 것이다. 이 생에서 허락된 우리의 시간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52년을 11일에’라는 제목의 뉴욕타임스 기사가 지난 주말 눈길을 끌었다. ‘아들,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를 찾다’라는 부제가 이어졌다. 생면부지의 아버지와 아들이 극적으로 만나 부자간 52년의 인연을 11일 동안 누렸다는 내용이다.


워싱턴 D.C.의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고위 공무원이었던 샘 앤소니(52)는 평생 친부모를 알지 못한 채 살았다. 태어나자마자 입양되어 신경외과 의사였던 양 아버지와 어머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다 보니 딱히 친부모를 그리워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2000년 어머니가 루게릭 병으로 사망하고, 2016년 아버지가 심장수술 합병증으로 사망하면서 친부모에게 생각이 미쳤다. 10여년 암 투병하며 그가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분들일까” - 구강암과 인후암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그는 지난해 9월 친부모를 찾기로 했다. 마침 30년 지기 직장상사가 계보 전문가였다. DNA 매치, 센서스 자료 대조 등으로 생모는 바로 찾아졌다. 그가 생모에게 편지를 했고, 생모가 전화를 해와서 통화를 했다. 하지만 그뿐, 생모는 그와의 교류를 거부했다. 과거 미혼모였던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생모를 통해 생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이 큰 수확이었다.

곧이어 애리조나에 사는 78세의 생부, 크레이그 넬슨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선뜻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 또 다시 거부당할 까봐 두려웠다. 그렇게 여러 달이 지나고, 그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하자 그의 상사가 대신 편지를 부쳤다. 8월 9일 넬슨은 멀리 버지니아에서 온 낯선 편지를 읽으며 전율했다.

50여년 전 넬슨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군복무 중 한 여성을 사귀었다. 어떤 오해로 두 사람은 헤어지고 그는 제대 후 고향인 포틀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얼마 후 옛 여자친구가 전화로 뜻밖의 사실을 알려왔다. 건강한 남자아이를 낳았고, 바로 입양 보냈다는 것이었다. 넬슨은 아이를 되찾기 위해 변호사들을 만나고 입양시설들에 문의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영영 잃어버린 아들이 반세기 후 그의 앞에 편지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바로 짐을 챙겨서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났다. 4일 동안 근 2,300마일을 운전해 앤소니의 집에 도착한 것은 8월 14일. 앤소니의 아내와 딸의 안내를 받아 넬슨은 난생 처음 아들을 만났다. 부자는 잃어버린 52년의 시간을 벌충하듯 서로 사진들을 보여주고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미 아들의 말소리는 해득이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리고 8월 20일 아들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아들이 이 생에서 함께 한 날은 딱 11일이었다.

이들 부자의 시간은 특별히 짧았지만, 우리 모두의 시간 역시 길지는 않다. 새해를 맞은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10월이듯, 돌아보면 태어나서 살아온 수십년이 잠깐이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 영구한 우주의 시간 속에서 찰나의 시간을 부여받을 뿐이다. 우리는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에만 살아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 이 생의 모든 만남과 관계도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대체로 잊고 산다.

그래서 빚어지는 것은 가치의 전도. 돈/소유에 집착하느라 시간흐름의 엄중함을 망각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좋은 예이다.


풍작으로 소출이 넘쳐나자 부자는 곡식 쌓아둘 공간을 걱정한다. 그리고는 곳간을 헐고 새로 지어 곡식을 잔뜩 쌓아놓고 두고두고 잘 먹고 잘 살 궁리를 한다. 그때 하느님이 이른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곳간을 새로 지을 게 아니라 곡식을 이웃과 나누면 될 일이었다. 더 갖고 싶어서 남의 것을 착취하고, 혼자만 갖고 싶어서 곳간을 늘리는 것이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다. 시간의 곳간을 재물이 아니라 나눔과 사랑으로 채우라고 성서는 가르친다.

인생은 짧고 인연도 짧다. 자식을 잃고 크게 상심한 어느 아버지에게 부처는 이런 위로를 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으로 함께 사는 것은 한 여관에 머문 나그네들 같은 것. 나그네들이 전날 밤 같이 모였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각자 자기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지금 함께 하는 모든 인연이 그러할 것이다. 이별/상실은 예비 되어 있다.

가을날, 지난 1년의 삶을 돌아보자. 인생의 본질은 시간, 그 시간들에 마땅한 것들을 채우며 살았는가, 많이 나누고 많이 사랑하며 더불어 즐김으로써, 삶의 시간에 기쁨을 그득히 채워 넣으면 좋겠다. 내일 당장 생이 끝난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비결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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