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개월, 572일만이라고 했다.
지난 9일 열린 LA필하모닉의 ‘홈커밍 콘서트 갈라’. 구스타보 두다멜 음악감독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무대에 다시 선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연주회 도중 세번이나 마이크를 잡고 청중과 오케스트라에게 감사를 표했다. 지난여름 할리웃보울에서 이미 대면연주를 재개했지만 “여기, 우리 집에 돌아온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라며 “이제 새로운 시작”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두다멜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실로 오랜만에 이 아름다운 연주장에 돌아온 많은 청중에게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울컥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1년반 만에 두다멜은 반백이 되었다. 반백이었던 마틴 샬리포 악장은 백발이 되었고, 연주회에서 자주 마주치는 LA타임스 음악비평가 마크 스웨드도 완전 은발이 되어 나타났다. 하지만 대부분의 LA필 단원들은 여전한 모습이었다. 그동안 어지간히 힘들고 답답한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 세월을 보상이라도 하듯 오케스트라 소리는 몇 배나 아름답게 들렸다.
만석을 이룬 관객석에는 한인들이 정말 많았다. 피아니스트 조성진 때문이었다. 조성진의 디즈니홀 연주는 이번이 세 번째다. 2018년 10월에 리사이틀로 데뷔했고, 2019년 11월 두다멜 지휘의 LA필과 함께 라흐마니노프 콘체르토 2번을 협연했다. 그리고 2020년 12월에 예정됐던 또 한 번의 독주회는 팬데믹으로 캔슬되었다.
이번 대망의 ‘홈커밍 콘서트’에 조성진이 협연자로 초대된 것은 세계음악계에서 스타연주자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2015 쇼팽콩쿠르에서 우승한지 불과 6년도 안 돼 이룬 그의 성취가 놀랍고도 자랑스럽다. 유명콩쿠르에서 우승했어도 곧바로 활동이 위축되고 관심권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조성진은 시간이 갈수록 더 성숙하고 세련된 연주력을 보이며 세계 음악계를 사로잡고 있다.
이날 음악회에서 조성진은 차이콥스키의 피아노협주곡 1번의 1악장을 더할 수 없이 멋지게 연주했다. 힘차고 화려한 도입부에서는 거침없이 기염을 토했고, 고난도 테크닉을 요하는 카덴차에서는 섬세하고 투명한 터치로 건반을 유린하며 비르투오소 경지에 오른 연주를 들려주었다. 청중은 우레와 같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LA타임스도 수정처럼 명징한 프레이징, 아름답게 반짝이는 종소리가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를 연상케 한다고 극찬해마지 않았다. 조성진의 연주를 보고 들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제 27세인 나이와 연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안정감과 침착함이다. 과장된 제스처나 감정, 꾸밈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음악의 정수로만 질주하는 절제된 태도가 언제나 경외심을 불러일으킨다.
협주곡의 1악장만을 연주한 이유는 이 공연이 ‘갈라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축제나 잔치를 뜻하는 ‘갈라’는 클래식, 오페라, 발레 혹은 피겨스케이팅에서의 특별행사로, 클래식에서는 보통 시즌 개막을 알리는 축하공연으로 갈라 콘서트를 연다. 대개 끝난 후에는 모금파티가 이어지기 때문에 화려한 드레스와 턱시도 차림의 패트론들이 오케스트라 석을 가득 채운 모습을 보는 것도 갈라 콘서트의 재미다.
진지하게 음악을 감상하기보다는 흥겨운 축제분위기라 여러 장르의 연주자들이 초청돼 ‘맛보기’ 공연을 펼치기도 하고, 레퍼토리는 전곡이 아닌 하일라이트만 연주하는 일이 흔하다. 교향곡과 협주곡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악장만 연주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이날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악장과 피날레를 장식한 말러교향곡 1번의 4악장이 그랬다.
이날의 ‘홈커밍 콘서트’는 진정한 갈라 콘서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축전이었다. 시작은 LA필이 젊은 작곡가 가브리엘라 오르티즈에게 위촉한 신곡 ‘카유마리’의 세계초연이었다. 반복되는 리듬 속에 점점 더 많은 악기들이 합류하면서 장엄하고 화려하게 폭발하는 현대판 ‘볼레로’ 같은 작품, 오케스트라의 빛나는 미래를 약속하는 듯한 음악이었다.
조성진 협연에 이은 이날의 ‘대박’은 가수 겸 배우 신시아 에리보의 공연이었다. 그래미상, 에미상, 토니상 수상자이며 오스카와 골든글로브에 두 번씩 후보지명된 에리보는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의 삽입곡 ‘어딘가에’(Somewhere)를 비롯해 3곡을 노래했는데 기막힌 가창력의 열연으로 청중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마지막의 말러교향곡 1번은 두다멜이 LA필 음악감독에 취임했던 2009년 갈라 콘서트에서 처음 연주했던 곡이다. 그때 28세의 베네주엘라 출신 곱슬머리 지휘자가 들려주었던 젊고 힘차고 열정적인 말러 1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후 디즈니홀과 세계무대에서 이 교향곡을 숱하게 지휘해온 두다멜은 이제 보다 정제되고 성숙하고 고양된 4악장을 연주하며 2021 갈라 콘서트를 마무리했다.
인터미션 없이 진행된 콘서트는 내내 뜨겁고 열기가 넘쳤다. 연주자들도 그 흥분을 느끼는 듯했고, 청중은 한곡 한곡마다 기립박수를 보내며 특별한 감동과 감사를 표했다. 10년 이상 LA필하모닉 갈라 콘서트를 거의 매년 지켜봤는데 이제껏 본 최고의 갈라였다.
지난 한 시즌을 통째로 접고 이제 개막된 2021-22 시즌에는 주옥같은 공연들이 줄을 잇는다. 팬데믹 동안 누구보다 큰 타격을 입었던 LA필과 음악계가 놀라운 회복력으로 힘차게 일어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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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